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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오름기행] 제주 신의 어머니 ‘백주또’ 모신 곳…높은 오름들이 지키고 있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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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오름기행 ① 송당리 당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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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오름에서 당오름을 내려다 봤다. 사방의 오름들이 당오름 을 에워싸고 있었다.

week&이 새 연재기획 ‘제주오름기행’을 시작합니다. 오름은 소(小)화산체를 가리키는 제주 방언입니다. 제주에는 한라산만 있는 게 아니라 368개 오름도 있습니다. 제주여행의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 잡은 오름을 하나씩 소개합니다.

 제주오름기행 ① 송당리 당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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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시 구좌읍 송당리는 제주 동쪽 내륙 중산간지역에 들어선 작은 마을이다. 검은 화산토 깔린 왓(밭)에 더덕·당근·유채·콩 따위를 심고 오름과 모루(언덕)에 소 풀어놓고 키우는, 주민 수가 1000명이 넘었다고 이장이 환히 웃으며 자랑하는 마을이다. 그러나 송당은 오름의 마을이다. 크고 작은 오름 18개가 송당리 안에 있다. 무엇보다 당오름이 있다. 마을 곁에서 마을을 지켜주는 영험한 오름이다.

제주 신의 어머니

당오름은 작고 낮은 오름이다. 그러나 당오름의 숲은 깊다. 사시사철 검푸르게 보이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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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기획 ‘제주오름기행’의 첫 순서는 송당리 당오름이어야 했다.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 거문오름도 있고, 제주를 상징하는 풍경 일출봉도 있고, 오름의 여왕 다랑쉬오름도 있지만, 무엇보다 제주에는 당오름이라 불리는 오름도 여러 개 있지만 제주의 오름을 두루 말하려면 송당리 당오름부터 올라야 했다. 제주사람에게 오름이 어떤 의미인지 안다면 당연하고 마땅한 순서였다.

 우선 익히 알려진 제주 창조신화에서 시작하자. 제주도는 설문대할망이 바닷속의 흙을 퍼서 만들었다. 설문대할망은 치마폭에 흙을 담아 날라 한라산을 쌓았는데, 한라산을 쌓다가 떨어진 흙이 섬 곳곳에 오름을 이루었다. 제주에는 이런 신화도 전해온다. ‘백주또’라는 여신이 제주에서 ‘소로소천국’이란 남자와 아들 18명과 딸 28명을 낳고 살았다. 백주또는 죽어서 마을을 지키는 신이 되었고, 자식들도 섬으로 흩어져 각 마을의 신이 되었다. 설문대할망 설화가 제주사람이 제주도라는 자연환경을 이해하는 방식이라면, 백주또 설화는 제주도에 정착한 제주사람의 일상을 풀이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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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오름은 온갖 종류의 나무로 빽빽하다. 사람이 들지 않았던 숲이다.

 백주또는 제주 당신(堂神)의 원조다. 1만8000명이나 된다는 제주 신의 어머니다. 백주또가 살았던 마을이 송당(松堂)이고, 백주또를 모신 본향당(本鄕堂)이 송당 당오름에 있다. 사실 제주도에는 송당리 말고도 당오름이라고 불리는 오름이 여러 개 있다. 이를테면 와산리(조천읍)·고산리(한경면)·동광리(안덕면) 등지에도 당오름이 있다. 당악(堂岳)·당산(堂山)·당산봉(堂山峰) 등으로 불리는 오름도 당오름의 다른 표기일 따름이다. 물론 이들 당오름에도 본향당이 있다. 그러나 모시는 신이 다르다. 이들 당오름이 모시는 신은 모두 백주또할망의 자손이다. 백주또할망의 아들이거나 딸이거나 손주이거나 친척이다. 백주또할망을 모시는 신당은 송당리 당오름에만 있다. 하여 송당리 당오름은 368개 제주 오름의 어머니 오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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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식 송당리장이 송당마을 특산품을 들고 포즈를 취했다. 더덕이 무척 실하다.

제주도 고유 지명에서 보이는 당팟(당밭)·당카름(당동네)·당캐(당개)·당골·당동산 등의 표기도 당신과 관련이 있다. 이들 마을에 가보면 지금도 본향당이 있다. 현재 제주도에는 본향당이 300곳이나 남아 있다고 한다. 마을에 본향당이 있다는 건, 지금도 정기적으로 당제를 올린다는 뜻이다. 물론 송당마을에서도 제를 올린다. 음력 1월 13일, 2월 13일, 7월 13일, 10월 13일 이렇게 1년에 네 차례 당제를 올린다. 송당리 당제는 1986년 제주도 무형문화재로, 송당리 당집은 2005년 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당제의 제주(祭主)는 마을의 이장이 담당한다.

 “제는 매인삼당(당을 책임진 무당)이 진행하지만 제주는 이장이 맡아요. 마을의 전통의식이기 때문이지요. 대단해요. 제물 올리는 할망만 250명, 구경꾼까지 합치면 800명은 넘게 모여요. 할망들이 제물 올리는 석단도 자리가 다 정해져 있어요. 백주또 할망 입으시라고 옷도 올리고, 옥돔 구워서 올리고, 떡이랑 삶은 달걀도 올려요. 네 발 달린 짐승은 절대 안 올려요. 백주또 할망랑 소로소천국 할방이 갈라섰던 거 아세요? 소로소천국이 소를 잡아먹었다고 백주또가 남편을 쫓아냈어요.”

 고정식(52) 송당리장의 설명은 의미심장했다. 제주신화에서 주도적인 역할은 여신의 몫이다. 백주또 설화에서도 증명된다. 백주또할망이 남편을 쫓아낸 이유도 되새길 만하다. 농경사회에서 소만한 재산도 없었다. 당제에 소·돼지를 올리지 않는 풍습은 한 번도 예외가 없었다.

소원을 빌다

 당오름(274m)은 송당마을 옆에 바투 붙어 있다. 마을의 해발고도가 200m 언저리이니 오름의 비고(比高)는 70m 안팎에 불과하다. 그러나 오름에 들어서면 느낌이 달라진다. 산은 낮고 작지만 숲은 깊다. 삼나무·소나무·밤나무·쥐똥나무 등 온갖 나무로 숲이 꽉 차 있다. 밀도가 높은 숲은 명도가 낮다. 햇빛이 나무에 걸려 내려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숲은 사시사철 검푸르다. 어두컴컴한 숲에서 왠지 모를 기운이 감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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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오름 둘레길에 있는 돌탑. 백주또할망에게 소원을 빌며 돌은 얹었다.

 제주사람은 오름에서 소를 풀어 키웠다. 하여 오름은 대개 민둥산이다. 큰 나무가 없어야 소가 자유로이 큰다. 제주를 여행하다 보면 이따금 삼나무 늘어선 오름이 보이는데, 일부러(또는 억지로) 조성한 숲이다. 민둥산을 참지 못했던 박정희 정부 시대의 유산이다. 그러나 당오름의 숲은 원시림처럼 빽빽하다. 애초부터 소는커녕 사람도 들락거리지 않았다는 증거다. 신의 영역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오름 둘레를 따라 완만한 탐방로가 나 있다. 지난해 7월 제주관광공사의 도움으로 말끔한 탐방로가 조성됐다. 오름 북서쪽 기슭에 다다르니 본향당이 나타났다. 길가에 늘어선 동백나무 가지에 소지(燒紙)가 걸려 있었다. 원래 소지는 제사가 끝나면 사르는데, 여기에서는 ‘소원나무’를 지정해 매달아 놓는다고 했다. 마을에서는 각자 소원을 적어 걸어두는 전통문화 체험으로 ‘소원나무’를 활용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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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오름 본향당. 작은 당집 안에 백주또할망을 모신 위폐가 있다.

 본향당은 의외로 작았다. 현무암으로 만든 작은 돌당집이 3개 층으로 이뤄진 석단 맨 위에 덩그러이 놓여 있을 따름이었다. 당집 안에 백주또할망을 모신 위폐가 있다고 했다. 석단에는 제물로 올린 음식이 아직도 남아 있었고, 동백나무 드리운 돌담이 당집을 두르고 있었다. 당집 오른편에 선 팽나무에 시선이 모였다. 제주도에서는 늙은 팽나무가 신목(神木)을 담당하는데, 제주 신의 어머니를 모시는 신목치고는 왜소한 편이었다. 무엇보다 가지 곳곳이 날카로이 베어져 있었다. 오창현 제주관광공사 지역관광처장의 설명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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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당 본향당 앞 소원나무에 걸어놓은 소지.

 “제주목사 이형상(1653∼1733)이 1년 남짓한 재임 기간 동안 제주 곳곳의 신당 129개 소를 불태우고 1000명 가까운 심방(무당)을 강제로 귀농시킨 일이 있었습니다.  성리학을 숭배하는 선비의 시각에는 제주도의 토속신앙이 허튼 미신행위로밖에 비치지 않았던 게지요. 일제 강점기에도, 1960년대 미신행위 금지령이 내렸을 때도 제주의 수많은 신당이 화를 입었습니다.  송당 본향당도 훼철(毁撤)의 역사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제주 신의 어머니를 모신 신당이니 오죽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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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향당 어귀에 서 있는 소원나무. 소원을 소지에 적어 걸어두면 백주또할망이 소원을 들어주신다고 한다.

 당오름을 걷기만 해서는 당오름을 알 수가 없었다. 당오름 둘레길은 걷기에 좋은 길이었지만, 외곽을 에두른 길만 걸어서는 당오름의 의의를 헤아리기 힘들었다. 그래서 당오름 옆의 높은오름을 올랐다. 높은오름의 해발고도가 405m다. 이름처럼 높아서 높은오름이다. 제주 동부 중산간지역에서 해발 400m가 넘은 오름은 높은오름이 유일하다.

 높은오름 정상에 올라서야 당오름을 이해할 수 있었다. 당오름과 송당마을은 생각보다 훨씬 가까이 있었다. 옆에 있는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하나인 것 같았다. 사위가 트이자 보이는 것도 있었다. 우뚝 솟은 오름들이 낮은 당오름을 보듬고 있었다. 안돌오름·밭돌오름·돝오름·다랑쉬오름·체오름·둔지오름 등 커다란 봉우리들이 멀리서 또는 가까이서 당오름을, 아니 이 섬의 어미 신을 지키고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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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정보=송당마을은 제주공항에서 자동차로 40분쯤 거리에 있다. 당오름 둘레길은 6㎞ 길이로 2시간이면 충분하다. 송당리사무소에서 출발해 괭이모루 삼나무길을 지난 뒤 본향당을 거쳐 마을로 돌아온다. 송당마을에도 웅스키친(064-784-1163)·에코브릿지커피(064-782-1305) 등 신흥명소가 있다. 그러나 송당마을의 특산품은 화산토에서 키운 농산물이다. 3월 중순 현재 더덕 20㎏ 상품 25만원, 메밀가루 7.5㎏ 8만원 등. 송당리사무소 064-783-4093.

글·사진=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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