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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28)작가 김유정-제81화 30년대의 문화계(161)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그때 야수파 서양학가로 이름을 날리던 구본웅이 같은 화우인 이상과 어울려 다녔는데, 어느 때 길에서 우연히 양백화를 만나 셋이서 술집으로 가는 길이였다. 양백화는 육척 장신에 몸이 연체동물 같이 흐느적거렸고, 이상은 까치집 같은 머리에 얼굴이 희고 털북숭이 수영 천지인데 겨울에도 흰 구두를 신었고, 구본웅은 키가 작은 꼽추인데 땅에 잘잘 끌리는 인버네스 외투를 입었다. 이 세 사람의 괴상한 행색을 본 애들이 곡마단이 왔다고 떠들면서 줄줄 따라오는 바람에 아주 혼이 났다고 이상이 이야기한 일이 있다.
이상은 구본웅을 졸라 그의 부친이 경영하는 출판사 창문사에 교정부원으로 취직했고, 구본웅의 후의로 창문사에서 구인회 동인지 『시와 소설』 을 돈을 내지 않고 출간하였다. 이즈음 그는 임이라는 여인과 수하동에서 몰래 동거하면서 소설『날개』 『봉별기』 같은 걸작을 썼다.
김유정이라는 작가와 알게 된 것은 이때부터여서 김유정은 심심하면 창문사로 이상을 찾아왔다.
김유정은 1908년 춘천에서 출생하였는데, 일찌기 모친을 여의고 형수 아래서 자랐다. 서울에 올라와 휘문고보를 졸업하고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였다가 폐결핵으로 중퇴하였다. 학업을 중단한 그는 폐결핵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금광에 손을 대 일확천금을 꿈꾸었으나 실패하고 1926년 고향인 춘천으로 돌아왔다. 이 금광에 대한 이야기는 자주 그의 작품 속에 나오는데, 단편 『금따는 콩밭』같은 것은 그의 작품 중에서 뛰어난 가작이었다.
춘천의 실레마을에 나가 야학 금병의숙을 설립하고 문맹퇴치, 농촌 계몽운동에 열을 쏟으면서 한편 1933년부터 작품을 쓰기 시작하였다. 193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소낙비』로 당선되었고, 같은 해 중앙일보에도 단편 『노다지』가 당선되었다.
이렇게 1935년 문단에 혜성같이 나타나 1937년 광주에서 별세할 때까지 3년 동안 30여 편의 주옥같은 단편을 발표해 우리 나라 농촌문학의 새 경지를 개척한 것이다.
그의 작품에서 『동백꽃』 『소낙비』 『금따는 콩밭』등을 수작으로 치고 있는데, 어떤 비평가는 그가 세상을 뜨기 직전에 쓴 『봄, 봄』을 『우리 나라 농촌의 토속적인 미학의 완성』 이라고 극찬하고 있기도 하다.
이상은 김유정의 모습을 이렇게 그리고 있다.
『창문사에서 내가 집무랍시고 하는 중에 떡 나를 찾아온다. 와서는 내 집무 책상 앞에 마주 앉는다. 앉아서는 바위덩어리처럼 말이 없다. 낸들 또 무슨 그리 신통한 이야기가 있으리오. 그저 서로 벙벙히 앉아있는 동안 나는 나대로 일을 한다. 가지가지 부호를 써서 내가 교정을 보고 있노라면 그는 불쑥 「김형! (이상의 본명은 김해경)거 지금 그 표는 어떻게 하라는 표요.」 「이거요, 글자가 곤두섰으니 바로잡으란 표지요」 하고 나서는 또 그만이다. 이렇게 유정은 뚱보다. 이런 양반이 한잔 들어가면 통성을 다시 해야 한다. 밤이 깊어 자는데 별안간 「김형! 이 유정이가 오늘 술 좀 먹었습니다. 김형! 우리 또 한 잔 하러 나갑시다.」이래서 어쩔 수 없이 나는 끌려나갔다.』
이렇게 두 사람은 의기상투해 지내는 판인데 그 두 사람이 똑같이 폐결핵 중환자라 한 때 병을 비관하고 둘이서 함께 죽으려 한 일까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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