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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단기술의 실습장 청계천 전자상가<중>|"모방" 벗고 "메이드 인 청계천"으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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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6·25이후부터 자리를 잡아온 청계천도 시대의 흐름을 따라 변모하고있다.
초기·라디오조립단계를 거쳐 전자·전기제품을 사다가 팔던 시대, 복사품을 만들던 시대에서 이제는 독자적으로 개발한 새로운 제품들을 내놓고 있다.
고등교육을 받은 엘리트들이 청계천을 「모험사업의 장」으로 삼고 뛰어들면서 사정이 달라지고 있다. 『청계천 2세대 컴퓨터인 16비트 퍼스컴 완제품을 이 달 안으로 시장에 내놓을 예정이다. 미국의 최신기종과 완전호환성이 있으며 똑같은 기능을 갖는 것으로 본체 모니터, 디스크드라이버 2대를 한 세트로 1백50만원정도에 판매할 계획』이라고 유진해씨(39·코리아시스팀연구소대표)는 밝혔다.
16비트 퍼스컴은 미국에서도 보급이 시작된 지 얼마 안 되는 것으로 유씨가 지난4월 개발에 착수, 이번에 완제품을 내놓게 된 것이다.
유씨는 71년 인하공대 전기과를 졸업하고 인천대강사를 하던 교수지망생이었다. 유씨가 대학강단을 떠나 청계천 세운상가 7층의 3평 짜리 사무실로 옮겨 앉은 것은 컴퓨터에 대한 호기심과 자신의 창의력을 강사라는 직업이 채워줄 수 없었기 때문.
청계천에 맨손으로 뛰어든 유씨가 제일 먼저 착수한 일은 당시 연구소나 대학 등에 소량으로 들어와 있던 애플퍼스컴을 그대로 복사해 시장에 공급하는 것.
유씨는 컴퓨터 하드웨어의 설계제작과 함께 국내 30여개 업체를 고객으로 특수한 생산설비의 고장수리도 맡고있다.
『돈은 못 벌었으나 내 자신이 설계한 새로운 제품이 만들어져 팔려나갈 때 가장 큰 보람을 느낀다』고 유씨는 청계천생활의 이면을 설명했다.
청계천은 누구나 자신의 창의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기술현장이기도 하고 미래의 컴퓨터왕국을 설계하는 젊은이들의 가능의 지역이기도 하다.
세운상가「가」동 4층에 있는 타임컴퓨터는 부산대 전기과를 작년에 졸업한 박윤식씨 (29), 올해 졸업예정인 김길성씨 (31), 그리고 홍대 경제학과 3학년 김병석군 (23) 등 3명이 지난 83년 9월 돈을 모아 보증금 3백 만원에 월세 25만원을 주고 설립한 컴퓨터 하드웨어 및 소프트웨어 제작회사. 3평 규모에 회사라기보다는 작은 실습장이라는 것이 더 어울린다.
대학에 들어가서부터 컴퓨터에 관심을 갖고 나름대로 공부를 해온 이들은 지난해 4월 「카나리아」라는 음악카드를 자체 개발해 자신들의 실력을 입증했다.
카나리아는 오선지를 모니터화면에 나타나게 하고 음표와 음계를 오선지에 처넣으면 이에 따라 9개 화음과 15옥타브로·컴퓨터가 스스로 연주를 해내는 소프트웨어. 컴퓨터를 처음 접하는 초보자에서부터 작곡에까지 응용될 수 있을 정도로 용도가 다양하다. 카나리아를 프로그램한 김병석군은『상당한 인기를 얻어 많이 팔았으나 다른 업체에서 금방 복제품을 싸게 파는 바람에 돈은 별로 벌지 못했다』며 『우리가 개발한 제품이 성공을 거둔 것에 큰 힘을 얻었다』고 했다.
이밖에 타임컴퓨터 팀은 대형 세탁기 제작업소인 경북기계에 세탁과정을 자동화한 컴퓨터시스팀을 개발, 납품했고 각종 광고물 및 올림픽용 전광판으로 이용되는 평면모니터 광고시스팀도 만들어냈다.
숭전대 산업공학과 3년에 재학중인 성문마씨(27·영진컨트롤)는 공장자동화 등의 시스팀엔지니어링 분야에서 나름대로 영역을 확보한 두뇌.
그는 83년 이곳에 발을 들여놓은 이래 이화정밀에 공정제어용 시스팀의 하드웨어 및 소프트웨어를 독자적으로 설계, 제작해 공급하는 한편, 한국기기산업에 민방공용 자동제어기기도 제작, 보급하였다.
또 마남 울산 한남화학의 새 공장 건설에 하청형태로 자동제어기기를 납품하는 등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 성씨는 『우리 나라 산업설비가 노후화 돼 이제 교체해야할 단계에 와 있다. 앞으로 이러한 생산설비교체에 컴퓨터 제어쪽을 국산화해 싼값으로 보급할 계획』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미국의 대형컴퓨터 수출업체의 한국지사인 아프코아코리아 기술이사로 안정된 생활을 보장받던 오영수씨(49·삼정마이컴대표)는 지난해 1월 10년간 몸담아온 먼저의 직장을 버리고 3.5평 짜리 사무실 2개를 얻어 자신의 기업을 차렸다.
『그 동안 쌓아온 기술을 발휘하고 독창적인 연구개발도 해보고싶어 독립했다』는 오씨는 『아직은 적자지만 보람은 느낀다』고 말했다.
오씨는 그 동안 컴퓨터를 이용, 서울동대문직물공장에 무늬 넣기 및 주름잡기 기계를 자동화하는 한편, 자동차의 자동분사제어장치를 국내 모자동차회사와 공동으로 개발해 내기도 했다.
또 그는 86, 88올림픽을 겨냥해 지금의 전광판보다 한발 앞선 카드섹션 형식의 빌보드 시스팀을 개발 중에 있다.
이처럼 청계천은 대학의 전문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뛰어들면서 모습을 바꿔가고 있다. 어깨너머로 배운 기술로 남을 모방하는 것에서 탈피, 이제는 새로운 「메이드 인 청계천」 의 상품을 내놓게끔 됐다.
청계천의 특징은 모든 기술개발이 1∼2명에 의해 수행되므로 기업에 비해 개발속도가 빠르다는 것. 또 난립한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새로운 제품을 만들어야한다.
이점이 청계천기술의 발전속도를 가속화시키는 원인이 되고있다.
83년9월에 문을 연 세운상가 4층 컴퓨터매장은 청계천제품의 질적향상 및 품질의 사후보증을 위해 상인들이 자치적으로 구성한 것. 83년만 해도 철새처럼 왔다 퍼스컴을 팔기만 하고는 문을 닫고 떠나버려 아프터서비스가 제대로 되지 않는 등 문제가 많았었다.
4층 컴퓨터매장 상인조합회장 김수룡씨(41·대암전자대표)는 『이곳에서 만들어지는 두뇌들의 제품을 질적으로 향상시키고 사후보증을 위해 컴퓨터매장 회원들의 자금을 모아 종합적인 아프터서비스센터를 만들어 소비자들이 안심하고 구입할 수 있게 할 계획이다』라고 밝혔다.
청계천은 이밖에 컴퓨터에 관심 있는 많은 학생들의 의문을 풀어주는 교육기능도 갖고 있다. 또 국내서 컴퓨터를 다루는 외국인들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곳이기도 하다.
서독의 텔레풍겐일본지사한국주재원 「라이너·헤이든」씨(42)는 『퍼스컴도 이곳에서 구입했으며 각종 소프트웨어도 이곳에서 구하고 있다』며 『이곳의 기술수준이 상당히 높은 것 같다』고 청계천을 평했다. <김상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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