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숙 독일제 옷 입기 싫다…아디다스 상징 뜯은 열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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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루이프

“축구를 하는 것은 간단하지만 간단한 축구를 하는 것은 어렵다.”

타계한 네덜란드 영웅 요한 크루이프
독재자 프랑코의 팀 안 가겠다
레알 거액 뿌리치고 바르샤로

24일 6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네덜란드의 축구 영웅 요한 크루이프의 말이다. 크루이프가 지병인 폐암으로 눈을 감자 전 세계 축구인들의 추모가 이어졌다.

미셸 플라티니(61) 유럽축구연맹(UEFA) 회장은 “나는 친구를 잃었고, 세계는 위대한 사람을 잃었다”고 그의 죽음을 아쉬워했다. 잉글랜드의 레전드 골잡이 게리 리네커(56)는 “축구를 가장 아름답게 만든 사람을 잃었다”고 했다. 현역 시절 라이벌 관계를 유지했던 프란츠 베켄바워(71) 바이에른 뮌헨 명예회장은 “큰 충격을 받았다. 크루이프는 좋은 친구를 넘어 형제와 같았다”고 회고했다.

울리 슈틸리케(62) 한국 축구대표팀 감독도 지난 24일 레바논전 직후 특별한 소회를 밝혔다. “레알 마드리드 1년 차일 때 바르셀로나 소속이던 크루이프와 맞대결한 적이 있다. 내가 1골·1도움을 기록해 레알의 3-2 승리를 이끈 기억이 생생하다”며 “크루이프를 존경했다. 더 이상 그와 함께할 수 없다는 사실이 슬프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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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루이프는 현대 축구 전술의 근간을 이루는 ‘토털 축구’를 완성한 인물이다. 그는 핵심을 찌르는 직설 화법으로도 유명했다. 크루이프는 “돈다발이 골을 넣어주진 않는다” “축구는 머리로 하는 스포츠다. 발은 단지 도구일 뿐이다” 등의 명언을 남겼다.

성격도 톡톡 튀는 편이었다. 1973년 네덜란드의 명문 아약스를 떠나 해외 진출을 추진할 무렵 레알 마드리드(스페인)가 거액의 연봉을 제시하며 러브콜을 보내자 “독재자(프랑코 총통)가 좋아하는 팀으로는 갈 생각이 없다”며 라이벌 FC 바르셀로나를 택한 건 유명한 일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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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디다스의 삼선 문양을 뜯어낸 뒤 두 줄 유니폼을 입고 경기에 나선 크루이프.

74년 서독 월드컵을 앞두고 네덜란드 대표팀이 독일 브랜드 아디다스와 스폰서십 계약을 맺자 “앙숙인 독일의 회사가 만든 옷을 입기 싫다”며 유니폼에 새겨진 아디다스 고유의 세 줄 문양을 두 줄로 고쳐 입고 경기에 나서기도 했다. 네덜란드의 간판 골잡이로 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 본선행을 이끈 뒤엔 “독재국가 아르헨티나의 땅을 밟지 않겠다”며 본선 출전을 거부했다.

크루이프는 타고난 골잡이였지만 경기 중 틈날 때마다 줄담배를 피워 ‘게으른 천재’로 불렸다. 그러나 ‘토털 축구’ 이론을 창시한 스승 리누스 미헬스 전 아약스 감독을 만난 뒤 전술의 중요성에 눈을 떴다. 동료들이 “공이 없는 지역에 있는 선수가 왜 뛰어야 하느냐”며 불만을 터뜨리자 “다 같이 뛰면서 전형을 잘 유지하면 오히려 체력을 덜 들이고도 이길 수 있다”며 적극적으로 설득했다.

지도자로 거듭난 크루이프는 친정팀 아약스와 바르셀로나의 지휘봉을 잡고 미헬스 감독의 전술을 가다듬어 현대 축구의 전술 흐름을 바꿔놓았다. 크루이프의 노력으로 ‘포지션’이라는 타이틀에 얽매이지 않고 모든 선수가 전형을 유지하며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경기 방식이 대세로 자리 잡았다.

송지훈 기자 milkym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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