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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22)제81화 30년대의 문화계|간송 전형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간송 전형필은 없어져가는 우리나라 문화재를 수집하여 보존한 공로로 마땅히 국가적으로 표창되어야할 사람이다. 나라가 망함에 따라 모든 것이 없어져 갔지만 그중에도 서화·골동같은 문화재들은 일본사람이 들어옴에 따라 자꾸 없어져 갔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기네 수중에 있는 보배의 가치를 모르고 돈 몇푼 주면 그것을 팔아 버리고 말았다. 값비싼 백자 항아리를 단돈 몇십전에 팔아 색색이 번쩍거리는 일본 기명을 샀다. 일본 상인들은 북촌 조선사람의 주택가로 많은 앞잡이들을 보내 『옛날 물건 파세요』라고 외치면서 집집마다 들어가 그럴듯한 물건을 물색해 싼값에 사들였다.
사방탁자·경상·문갑·필통·연적·항아리·주전자 같은 것이 이렇게해서 자꾸 진고개 일본 골동상으로 팔려갔다. 일본상인은 이것을 사가지고 동경·대판 등지로 보내 몇백배, 몇천배씩 이익을 남기고 팔았다.
이것은 비교적 값싼 물건이지만 값비싼 국보급의 고서화도 이렇게해서 많이 국외로 흘러나갔다. 이것을 보고 이래서는 안되겠다고 서화·골동의 수집에 나선 애국자가 간송 전형필이다.
그는 서울출신으로 1906년 중추원 의관이었던 전영기의 아들로 서울 배우개장 부근에서 출생하였다. 그 집안은 배우개장(이현시장), 지금의 동대문시장에서 큰 장사를 하여 돈을 많이 모은 사람으로 전형필의 양부는 그때 서울에서 다섯째 안에 드는 큰 부자였다고 한다.
휘문고보를 다닐 때 도화선생이 춘곡 고희동이었는데 그때부터 그림에 취미를 가지게 되었고, 나중에 유명한 서양화가가 된 청구 이마동과는 같은 클라스의 동창이었고 시인 영랑 김윤식과도 동창이었다. 그때 간송은 야구부장이었고, 이마동은 미술부장이었다고 한다. 월탄 박종화와는 내외종간이어서 자주 왕래했고 이렇게 화단·문단으로 친구들이 많았다.
휘문고보를 졸업하고 동경으로 건너가 조도전대학에 들어갔는데 여기서 서구식 문학에 접하였고 음악·회화·연극 등 예술방면에 큰 흥미를 가지고 음악회·전람회·연극공연에 자주 출입하였다.
동경유학중에 부친상을 당해 돌아왔는데 이때부터 서화·골동의 수집을 시작하였다. 서화·골동을 수집하는데 고문격으로 모신 사람이 위창 오세창이었다. 모든 것을 위창한테 의논하였고 위창의 지도 아래 움직였다.
우선 서울성북동에 있는 1만평짜리 산장을 부래상이라는 한국 이름을 가진 프랑스 사람에게서 사 위창이 「북단장」이라 이름을 지었고 그 안에 서양식 2층 양옥의 미술관을 지었는데 「사화각」이라고 위창이 명명하였다. 이 「사화각」이 요새 1년에 몇번씩 고서화 전서회가 열리는 간송미술관이 되었다.
부자집 아들로 주색에 빠지는 것이 보통이지만 간송은 뜻이 다르니만큼 생활태도도 달랐다. 옷부터 검소해 늘 한복을 입고 다녔는데 무명 두루마기에 고무신을 신고 다녔고, 근래에 와서 양복을 많이 입었지만 그 양복도 후줄근한 옷이었다.
이런 생활태도는 육당 최남선과 일맥 상통하는 데가 있는데 간송이 서화·골동을 수집하려고 마음먹은 그 발상부터가 육당이고서의 산일을 막기 위하여 조선광문회를 만든 것과 공통된 점이 있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두사람이 뚱뚱한 것도 같고 음식량이 많은 것도 같다.
해방전 간송이 그때 본정통에 있는 삼중정식당에 들어가 5인분의 고기 전골을 시켜 혼자서 유유히 다 먹어 종업원을 놀라게 했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조용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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