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사설

유권자 우롱한 새누리당 ‘공천 내전’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6면

김무성 대표의 ‘무공천 귀향 사건’으로 촉발된 새누리당 내전(內戰)이 하루 만에 봉합됐다. 김 대표가 공천장에 도장을 찍지 못하겠다고 버티던 6곳 가운데 3곳을 양보하고 나머지 3곳은 자기 뜻대로 관철한 것이다. 김무성 대표의 입장 변화는 어제 최고위원회의 등에서 친박 세력의 설득과 압력이 영향을 미쳤기 때문일 것이다. 이로써 청와대와 집권당 내부를 뒤집어놨던 ‘김무성의 반란’은 일단 양 세력의 타협과 절충으로 균형점을 찾았다. 다만 단호하고 비타협적인 결의를 표명한 뒤 하루이틀 만에 물러서거나 굴복한다고 해서 김 대표에게 붙은 ‘30시간의 법칙’이란 별명은 이번에도 적용됐다.

김 대표가 양보함으로써 후보등록 마감 시간에 겨우 맞춰 공천장을 낼 수 있었던 정종섭(대구 동갑)·추경호(대구 달성) 후보는 이른바 진박(진짜 박근혜계) 가운데서도 박 대통령이 가장 아끼고 총애하는 사람이다. 정종섭 전 행정자치부 장관은 최근 박 대통령의 경북도청 행사 때 현역 의원들을 제치고 가장 앞줄 좌석에 배치됐다. 추경호 전 국무조정실장은 박 대통령이 관료 출신 중 가장 신뢰하는 인사로 박 대통령의 정치적 고향인 달성군에 내려보낸 인물이다. 만일 이 둘의 후보 등록을 김 대표가 끝까지 막았다면 당장 박 대통령의 서릿발 같은 반격을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김 대표가 끝까지 우겨서 무공천한 곳에는 유승민(대구 동을)·이재오(서울 은평을) 의원이 무소속으로 후보 등록을 마쳤다. 두 사람은 이한구 위원장이 주도했던 친박패권 공천의 대표적인 희생자로 꼽히는데 김무성 대표가 이를 바로잡는 모양새가 됐다. 결국 새누리당의 내전은 김 대표가 박 대통령의 역린(逆鱗)을 건드리지 않으면서 자신의 명분을 챙기는 물밑 거래로 마무리됐다.

막을 내린 새누리당 막장공천의 뒤끝은 쓰다. 집권당의 공천 과정이 당내 민주주의, 정치문화의 모범이 되지 못할망정 온갖 밀실·사천(私薦)·불공정 논란과 질 낮은 블랙 코미디 같은 황당한 사건의 연속이었다. 유권자의 정치혐오와 냉소는 깊어졌다. 그에 따른 민주주의 비용은 헤아릴 수 없다. 벌써부터 추악한 공천 드라마를 외면하는 유권자들이 늘어나는 바람에 저조한 투표율을 걱정하는 소리가 나온다.

박 대통령은 국회와 정치권이 ‘본인들의 정치’ ‘각자의 정치’만을 추구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새누리당에서 그동안 벌어진 공천 파동은 박 대통령의 친위세력들에 의해 주도됐음을 직시해야 한다. 친박 세력이 대통령의 눈치를 보면서 패권 정치를 이끌어갔다는 비판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대통령의 국정지지도가 떨어지는 추세도 민감하게 받아들이길 바란다. 김무성 대표의 도장 정치는 잘못된 공천을 일부라도 바로잡았다는 다소의 명분을 얻었다. 하지만 집권당 정치를 우스꽝스럽게 만들고 처음부터 오류 시정에 소극적이었던 원죄와 우유부단까지 씻어주진 못할 것이다. 역대 최악의 집권당 공천 파동이었다. 이번 공천은 오만과 독선에 취해 유권자를 우습게 알고 우롱했다고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