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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가 오바마보다 더하네…냉가슴 앓는 월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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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8년간 금융규제에 시달린 월가
공화당 후보 밀어주려 별렀지만
트럼프, 반월가 시각에 계획 삐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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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월가는 칼을 갈았다. 미국 대통령 선거에 맞춰서다. 아메리칸뱅커스(AB)는 최신호에서 “월가는 버락 오바마의 금융규제에 시달렸다”며 “대선에서 변화를 꾀하려 했다”고 전했다. AB는 월가의 핵심인 금융그룹 임원들의 시각을 대변하는 전문 매체다.

[똑똑한 금요일] 미 금융권력 흔든 ‘좌충우돌 경제학’

마침내 때가 왔다. 올 11월 대선을 앞두고 민주·공화 양당이 대표 선수를 뽑기 위해 경선을 치르고 있다. 월가가 본격적으로 ‘돈의 힘’을 보여줄 때가 됐다. 어느 쪽을 지원할지 예상하기 어렵지 않았다. AB는 “오바마의 규제 사슬을 조금이라도 풀기 위해 월가 사람들은 공화당 후보를 지원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런데 뜻밖의 사건이 벌어졌다. 도널드 트럼프가 공화당 경선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다. 트럼프는 월가엔 ‘정체불명의 혜성’이다. 월가가 그의 경제 철학이나 정책을 가늠하기 어려워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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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월가 사람이 트럼프를 지지하고는 있다. ‘기업 사냥꾼’ 칼 아이컨이 대표적이다. 트럼프는 “내가 대통령이 되면 아이컨을 재무장관에 지명하겠다”고 공언했다. 독일계 금융그룹인 도이체방크도 트럼프 편으로 전해졌다. 도이체방크는 트럼프 가문에 자금을 빌려준 은행이다. 하지만 월가의 대변인 제이미 다이먼 JP모건 회장 등 월가 대다수는 트럼프를 알 수 없는 인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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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월가는 뜻밖의 인물에게 호되게 당한 적이 있다. 1901년 윌리엄 매킨리 당시 대통령이 무정부주의자가 쏜 총에 맞아 숨졌다. 권력이 시어도어 루스벨트 부통령에게 이전됐다. 그는 당시 43세였다. 그 시절 월가의 실세인 존 피어폰트 모건은 “그 젊은 친구가 누구인지 모르겠다”고 반응했다. 사실 매킨리는 월가의 지원을 업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월가는 매킨리만 잡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가 부통령으로 지명한 루스벨트에 대해선 개의치 않았다.

예상치 못한 저격 사건이 역사의 물줄기를 바꿔놓았다. 루스벨트는 백악관에 들어선 직후 사문화한 반독점법을 꺼내 모건 등이 추진한 기업 합병에 철퇴를 가했다. 월가가 허를 찔렸다. 이후 월가는 기민하게 대통령 후보나 정치인을 간별하기 시작했다. 선거자금을 누구에게 줘야 기대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는지를 잘 따졌다.

그런데 최근까지 월가는 트럼프에게 선거자금을 거의 지원하지 않았다. 트럼프의 선거자금 대부분이 자신의 호주머니에서 나왔다. 월가 자금이 흘러 들었을 법한 ‘고액 후원’ 항목은 선거자금의 7%도 되지 않는다. 힐러리 클린턴은 75%가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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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이코노미스트지는 최근 “월가가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을 리스크(위험 요인)로 보고 있다”고 보도했다. 워싱턴포스트(WP)는 23일 금융인의 말을 빌려 “월가 금융인과 트럼프의 경제 철학·정책에선 공통분모가 거의 없다”고 평했다.

흥미로운 현상이다. 월가 금융인이나 트럼프 모두 미국 사회에서 성공한 쪽이다. 소득수준으로 상위 1% 안에 들어간다. 한쪽은 머니 게임으로 다른 한쪽은 부동산으로 돈을 벌었다는 게 다를 뿐이다. 이런 양쪽이 앙앙불락(怏怏不樂)하고 있다. 티격태격 수준이 아니라 보수 내부의 이데올로기 싸움이 치열하게 펼쳐지고 있다.

|“보호무역, 금융 세금 인상” 주장
월가 철학 ‘돈의 자유?까지 묵살
WSJ “그는 가장 약체” 공격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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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는 월가 사람들이 미국 경제에 기여한 게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헤지펀드 매니저 등이) 경제를 건설하지도 않았고 잘못을 저지르고도 법망을 빠져나간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는 미국 제조업이나 중소기업 등이 곧잘 드러내는 반(反)월가 시각이다. 그들은 법인세나 소득세 인하를 주장하면서 동시에 금융 관련 세금 인상을 지지한다. 아니나 다를까. 트럼프는 “배당 소득과 장기 자본이득에 대해서도 세금을 새로 물리거나 인상하겠다”고 공약했다. 대신 “법인세와 소득세의 최고 세율은 낮추겠다”고 했다.

트럼프는 “중국산 제품에 대해 높은 관세를 매기고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수정하거나 폐기해 일자리를 지키겠다”고 선언했다. “불법체류자를 붙잡아 추방하겠다”고 했다. 노동력뿐 아니라 자본 이동에 대해서도 족쇄를 채울 요량이다. 그는 “미국 기업이 법인세를 피해 본사를 다른 나라로 옮기거나 해외에 현금 자산을 비축하는 걸 막겠다”고도 했다. 철저한 고립주의 시각이다.

이는 월가가 공유하는 기본 철학을 사실상 부정하는 공약들이다. 월가의 금융자본은 ‘돈의 자유’를 중시한다. 돈이 한 푼이라도 더 이익을 좇아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자유다. 이를 위해 월가는 글로벌 차원의 규제 완화와 통일을 추구했다. 심지어 빌려준 돈을 받아내기 위해 미국의 정치·군사적 패권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배리 아이컨그린 교수는 저서 『글로벌화하는 자본(Globalizing Capital:A History of the International Monetary System)』에서 “남미에 외채위기가 일어나자 월가는 직접 나서기보다는 워싱턴과 국제통화기금(IMF)을 끌어들였다”며 “월가는 채권 회수를 미뤄주는 대가로 남미 국가에 IMF의 긴축정책을 강제했다”고 설명했다. 이는 전문가들이 말하는 월가 국제주의의 한 단면이다.

‘월가 국제주의’에는 자유로운 교역과 자본 이동이 보장돼야 한다는 철학이 깔려 있다. 이 철학에서는 미국이 이익만이 아니라 손해도 볼 수 있다고 여긴다. 예컨대 자유로운 교역 등으로 인해 미국인의 일자리가 줄어드는 걸 감수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반면 트럼프는 철저히 보호주의 우선이다. 그는 “우리(미국) 일자리가 우선”이라고 외친다. 트럼프의 경제 철학은 한 세기 가까이 미국에서 대세로 인정된 월가 국제주의에 대한 부정인 셈이다.

월가 국제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 종전과 함께 싹텄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월가의 역사가인 존 스틸 고든은 『월스트리트 제국』 등에서 “1차 대전이 끝난 1918년에 미국이 세계 최대 채권국이 됐다”고 말했다. 영국·프랑스에 전쟁물자를 수출한 대가였다. 월가는 영국·프랑스에서 돈을 받아내는 데 애를 먹었다. 독일이 전쟁 배상금을 제때 지급하지 않았고 영국과 프랑스 경제도 침체됐기 때문이다.

고든은 “당시 월가는 미 정부를 움직여 유럽 문제에 개입하게 했다”고 설명했다. 그 시절 미 정부는 여전히 먼로주의(고립주의)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월가는 “미국 이익을 위해 채권을 받아내야 한다”는 명분을 내걸었다. 미 정부는 독일의 전쟁 배상금 문제에 적극 개입했다.

대공황 때 월가는 보호무역주의를 반대했다. 반면 미국 제조업 쪽은 다른 나라의 블록화에 대응해 관세장벽을 높여야 한다고 외쳤다. 제조업의 목소리가 반영되면서 결과적으로 세계경제는 더욱 수렁에 빠졌다. 이런 경험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엔 “월가의 무역과 금융 자유화 논리를 바탕으로 해서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과 IMF 체제가 등장했다”고 아이켄그린 교수는 설명했다. 이때부터 자유로운 무역과 금융거래가 미국인의 경제 상식으로 뿌리내렸다. 트럼프의 공약은 이런 규범을 뒤엎는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트럼프 경제정책을 미국을 홀리는 ‘개똥 경제학(mockery economics)’이라 부른다.

사정이 이쯤 되자 월스트리트저널(WSJ)은 3월 들어 사설과 칼럼을 통해 트럼프를 본격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WSJ는 “트럼프는 공화당의 역대 경선주자 가운데 76년 제럴드 포드 이후 가장 약체”라고 했다. 여기엔 트럼프를 마뜩지 않아 하는 월가의 속마음이 드러나 있다. 트럼프 진영은 발끈하며 WSJ에 사과를 요구했다. 일전을 피하지 않겠다는 태세다.

문제는 앞으로다. 트럼프가 경선에서 이기면 공화당 공식 싱크탱크가 그의 공약을 가다듬게 된다. 현재 정제되지 않은 발언 등이 어느 정도 수정될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고 월가가 트럼프에 품고 있는 의구심을 거두기는 어려워 보인다. WP는 “월가 사람들 눈에 트럼프는 ‘판을 깨는 사람’으로 인식돼 있다”고 전했다. 의심의 생명력이 유달리 강한 곳이 금융시장이다.

강남규 기자 disma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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