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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인, ‘호랑이가 산으로 간 까닭은 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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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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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환
JTBC 정치부 차장

지난 1월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비상대책위를 맡아 입당했을 때 이 지면을 통해 김 대표를 사실상 마지막 승부를 위해 다시 산으로 간 호랑이에 비유하는 정치권의 시각을 소개했다. 지난 대선에서 선거 캠프에 같이 있었던 핵심 인사들은 그 호랑이를 여권에서 잘 잡고 있었어야 했는데 놓치는 바람에 제1야당으로 넘어갔다고 아쉬워하면서도 경계의 눈빛을 번뜩였다.

비유를 살리자면 제1야당은 진보 패권주의 세력이라는 또 다른 호랑이가 장악하고 있는 험준한 산이다. ‘산은 두 마리의 호랑이를 허락하지 않는다(一山不容二虎)’는 중국 속담은 산이 아니라 호랑이의 특성을 압축하는 말이다. 패권을 잡고 있는 기성 세력과의 승부는 이미 예고된 수순이었다.

김 대표는 더민주의 체질 개선을 명분 삼아 거의 무풍지대에서 원톱으로 공천 정국을 질주했다. 여당의 공천 소용돌이 속에서 김 대표가 지휘봉을 잡은 더민주는 고비를 넘기고 전열을 정비했다는 평가가 많았다.

그런 가운데 터진 비례 공천 논란은 호랑이들 간 첫 결투였다. 사퇴 배수진을 치고 논란을 정면 돌파한 김 대표가 일단 승기를 잡았다.

김 대표는 취임 이후 호남과 중도층의 국민의당 쏠림세를 차단하는 방파제 같은 역할을 해왔다. 총선을 20일 앞둔 시점에서 김 대표의 위상이 더 커지고 있는 현실도 김 대표에게 유리한 지형이었다. 국민의당 안철수 대표의 중도 색채는 안 대표보다 이념 스펙트럼상 더 오른쪽에 있는 김 대표에게 막혀 제자리를 맴돌고 있는 형국이다. 이런 김 대표의 존재감이 첫 결투의 승부를 가른 것이다. 얻은 것 못지않게 잃은 것도 있다. 김 대표의 비례대표 기호 2번 배정을 놓고 내부적으로 불가피한 사정이 없을 리 없겠지만 대중적 정서와 거리가 있다는 점에서 한바탕 소동이 일었다. 이번 사태가 남긴 교훈은 앞으로의 당 혁신에서 방점을 두고 추진해야 하는 숙제도 남겼다.

김 대표는 “후순위로 놓는 것이 오히려 꼼수”라고 주장했지만 2000년대 이후 당 대표가 비례 후순위에서 배수진을 치고 선거에 임하는 게 관례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당 대표 회의실의 김 대표 자리 뒤에는 ‘수권정당·일류정당·총선승리’라는 슬로건이 붙어 있다. 건전하고 전문성으로 무장한 제1야당은 정당 민주주의의 근간이다. 여당을 긴장시키고 더욱 혁신하도록 압박하는 존재다. 이런 혁신 경쟁을 통해 정치가 발전하기 때문이다. 더민주 두 호랑이의 결투는 건곤일척(乾坤一擲)의 단판 승부로 매듭 짓는 승부가 아니다. 가까이는 총선, 멀게는 대선과 그 이후 지방선거까지 시야를 넓혀야 들어오는 장기전이다. 누군가는 산을 떠나야 하는 냉혹한 승부이기도 하다. 그 긴 싸움에서 김 대표가 믿고 의지할 언덕은 보편적 상식을 갖고 제1야당의 환골탈태(換骨奪胎)를 지켜보는 대중일 것이다.

정용환 JTBC 정치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