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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재 개그’야 고맙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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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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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현
JTBC 정치부 차장대우

누군가 내 진심을 알아주면 정말 고맙다. 사소한 일상의 대화에서도 고맙거나 섭섭한 상황은 속출한다. 분위기 좀 띄우려고 꺼낸 농담이 차갑게 내팽개쳐졌을 때의 난감함이란….

그런 상황에서 한동안 썰렁하다는 말이 유행했다. “아 추워”라는 반응이 확산됐고 농담을 한 당사자가 스스로 덜덜 떨면서 화제를 돌리는 임기응변도 탄생했다. 그렇게 재미없는 농담은 ‘썰렁 개그’라는 이름으로 한동안 인기를 모았다. 썰렁 개그는 서로 무안할 정도로 어색한 농담 때문에 망친 분위기를 회복시키는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최근엔 썰렁 개그의 자리를 ‘아재 개그’가 대신하고 있다. 아재는 아저씨의 낮춤말. 아저씨가 어떻게든 웃기려고 구사하는 농담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웬만해선 누군가를 웃기기 힘든 센스 없는 아저씨들에게 가슴 아픈 표현인데 이게 반복되면서 하나의 개그 장르가 됐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아저씨 입장에서 참 감사한 일이다. 나이가 들수록 뒤처지는 유머 코드를 보완해 주니까. 예전에는 처참한 실패로 끝났을 농담이 아재 개그라는 문패를 달고 부활한다. 아재 개그의 예를 들면 대충 이런 식이다. 초등학생들의 난센스 퀴즈와 비슷하다.

문: 딸기가 회사에서 잘리면? 답: 딸기시럽(실업)

문: 전화로 세운 건물은? 답: 콜로세움

문: 세상에서 가장 큰 여자는? 답: 태평양

문: 누가 치고 갔을 때 가장 먼저 할 일은? 답: 친자확인

헛웃음이 나오는 문답이지만 묘하게 중독성이 있다. 초등학생이나 중학생 자녀를 둔 아재들에겐 더 그렇다. 하나라도 외워서 아이들에게 써먹고 싶어진다. 아재 개그 시스템의 가장 큰 장점은 실패해도 오히려 소통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굳이 외워서 준비한 문답이 아니어도 허접한 농담에는 “아이, 아재 개그”라는 답변이 돌아온다. 부정적인 반응에도 기분이 나쁘지 않다. ‘아재 개그’라는 자녀의 한마디엔 ‘아빠 웃기려고 한 건 알겠어. 그래도 그건 아니지’라는 다정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

누가 작명을 했는지 아재의 한 사람으로서 고맙다. 가족과의 소통에서 좌절감이 커지는 중년을 위로하는 것 같다. 여간해서는 웃지 않는 사춘기 자녀에게 자신 있게 농담을 건넬 용기를 준다. ‘안 웃기면 어때, 아재 개그인데’라고 버틸 수 있는 안전한 구조 덕분이다.

아재 개그가 왜 유행하는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성과주의에 내몰린 이 시대의 중년들이 그만큼 짠했기 때문에 생겨났을 수도 있다. 아재들을 위로하고 싶은 사회 구성원들의 마음이 이심전심으로 모였을지도 모른다. 늘 부족하다고 지적받는 처량한 아재들을 위해 이 사회가 준비한 집단예능이라고 믿고 싶다. 그래서 고맙다.

김승현 JTBC 정치부 차장대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