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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동설은 태양을 기준으로 본 ‘역지사지’의 관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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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1호 26면

얀 마테이코가 그린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 신과의 대화’(1872년 작)

지금으로부터 꼭 473년 전인, 1543년 3월 21일(율리우스력)은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발표한 날로 알려져 있다. 태양계의 궤도를 처음 이론화시킨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가 그날 혹은 그 직전에 출간됐다는 추정 때문이다.


사실 지동설은 이미 고대 때에 등장했다. 더구나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의 증거를 제시한 것은 아니다. 코페르니쿠스 대신에 안드레아스 오시안더가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 서문에서 ‘지동설 가설은 반드시 사실이어야 한다거나 입증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고 언급하고 있다. 코페르니쿠스는 지동설이 사실이라는 점보다 천체를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다는 점을 더 강조했다.


지동설은 원형 대신 타원형의 운동임을 밝힌 케플러, 망원경으로 관측한 갈릴레이, 만유인력을 발견한 뉴턴 등이 과학적 근거를 제시함에 따라 사실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만일 공간을 접어 이동하는 축지(縮地)적 운동이 존재하다면 지동설 또한 바뀔 수 있음은 물론이다.

케플러·갈릴레이·뉴턴이 근거 제시움직임에 대한 판단은 움직이지 않는다고 전제한 기준점과 비교해서 내려진다. 두 사물 간의 위치가 달라지면 적어도 한 사물은 움직였다고 인지된다. 예컨대 두 기차가 나란히 서있을 때 차창 밖으로 보이는 옆 철로의 기차 모습이 바뀌면 옆 기차가 움직인 것으로 인식할 수도 있고 아니면 자신이 탄 기차가 움직인 것으로 느낄 수도 있다.


지구와 태양 간의 위치가 달라진다는 정보만 있다면, 지구의 공전 운동은 그림 1뿐 아니라 그림 2로도 그릴 수 있다. 그림 1은 태양(황색)이 고정되어 있다고 전제한 후 태양에서 관찰되는 지구(청색)의 운동 궤도를 그린 것이고, 그림 2는 반대로 지구가 고정되어 있다고 보고 지구에서 관찰한 태양의 궤도를 나타낸 것이다. 동일한 태양~지구의 위치 관계는 보는 관점에 따라 전혀 다르게 그릴 수 있다. 실제로는 자신이 남의 주위를 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이 자신의 주위를 돌고 있다고 인지할 수 있는 것이다.


어느 것이 움직였는지를 판단할 때에는 종종 다른 사물 위치와 대조한다. 일반적으로 여러 사물 가운데 위치가 달라진 사물은 움직인 것으로 판단한다. 만일 하나만 움직이지 않고 나머지 모두가 동일한 방향으로 움직였다면 움직이지 않은 나머지 하나만이 움직인 것으로 오인받기도 한다. 그래서 다수가 주장하는 거짓이 참으로 받아들여지는 ‘삼인성호(三人成虎)’가 발생하기도 하는 것이다. 본래 대중의 생각에 가까웠고 그 생각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정치인은 대중의 의식이 바뀌면서 오히려 극단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림 3과 그림 4는 다르게 보이지만 태양~지구~화성 간의 위치는 동일하다. 지동설의 그림 3에서 태양은 고정되어 있고, 지구와 화성(적색)이 각자 일정한 속도로 또 태양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태양을 돈다. 천동설의 그림 4는 지구를 중심으로 하여 그림 3을 다시 그린 것이다. 태양이 지구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지구를 돌고, 또 화성도 태양(지구가 아님)과 일정한 거리를 둔 채 지구를 조금 복잡하게 돈다.


두 그림에서 태양~지구의 거리는 동일하고, 태양~화성의 거리도 일정하다. 흑색 삼각형으로 표시된 그림 4의 태양~지구~화성 간 거리 및 각도는 그림 3과 일치한다. 또 녹색 선분으로 표기된 태양~지구~화성의 관계도 두 그림이 동일하다. 천동설 관점에서 본 세 별 간의 관계는 어떤 시점에서도 지동설 그림과 일치한다.


천동설이라고 해서 별 궤도를 부정확하게 그린 것은 아니다. 천동설은 지구가 움직이지 않는다고 전제하고 하늘에 보이는 대로 정확히 그리고자 했다. 지구를 고정시킨 상태에서 나머지 별들의 움직임을 그렸던 것이다.


같은 움직임도 관점에 따라 다르게 그릴 수 있다. 같은 상황이 태양 중심이냐 지구 중심이냐에 따라 그림 3이 되기도 하고 그림 4가 되기도 한다. 태양 중심의 그림 3에서 화성의 궤도는 원 모양이지만, 지구 중심의 그림 4에서는 사과 모양의 궤도가 된다. 보는 관점에 따라 화성의 궤도가 뒤바뀌는 것이다. 자기 관점에서 보이는 게 다가 아니고 또 사실이 아닐 수 있다. 다른 모순된 요소 때문에 천동설은 결국 폐기되고 말았다.


관점 바꿈으로써 상황 자체를 바꿔지동설의 전략적 의미는 관점을 바꿈으로써 상황 자체를 바꿀 수 있다는 점이다. 인식이 대상의 속성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인식에 따라 대상의 속성이 달라짐을 임마누엘 칸트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으로 불렀다.


누구나 자기중심적 입장에서 바라보게 된다. 지구 위에서는 지구가 움직이고 있다고 느끼기 어려운 상황에서 그림 4처럼 지구를 중심에 두고 태양 등의 움직임을 살펴보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인식 방식이었다.


이에 비해 태양 위 혹은 태양계 밖에서 세 별을 관찰했다면 그림 3을 먼저 받아들였을 것이다. 지동설은 자기(지구)가 아닌 태양을 중심에 두고 자신을 포함한 여러 행성의 운동을 바라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지동설은 기준점을 지구에서 태양으로 바꿔본 일종의 역지사지(易地思之)의 관점이다.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 9쪽. 천체 회전의 중심은?지구가 아닌 태양임을 보여주고 있다.

근세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탈피하여 관찰하는 것에서 시작했다. 코페르니쿠스의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는 비슷한 시기의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처럼 근세를 출범시킨 고전이 되었다. 있는 그대로를 말할 수 없던 중세 질서를 바꾸려는 시도였다. 『군주론』과 마찬가지로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도 교황청은 금서로 지정했고 지동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종교재판에 부쳐졌다. 갈릴레이는 고초를 겪다가 코페르니쿠스의 견해를 지지하지도 않고 가르치지도 않는다고 서약하여 고난을 피하기도 했다.


탈(脫)근대에 와서는 객관화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인식도 증대했다. 그래서 ‘정치적 옳음(political correctness)’이라는 용어가 나왔다. 어떤 정치인의 발언을 보면 틀린 말이 별로 없고 정확하지만 국민들은 수긍하지 않는다. 오히려 두루뭉실한 언행이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선거 때가 되면 정치인들의 막말이 더욱 기승을 부린다. 대부분은 편을 가르고 증오심을 부추겨야 결집이 잘 되고 득표율도 올라갈 것으로 믿기 때문이다. 선거 유세 등에서 대중들을 선동하여 지지율을 높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특정한 세대·성·지역·계층을 폄하했다가 큰 곤욕을 치르기도 한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미국 대통령 예비선거에서 ‘정치적 옳음’에 염증을 느낀 일부 미국 유권자들이 도널드 트럼프에 환호하고 있는 반면, 다수의 미국 국민들은 편을 가르고 증오심으로 결집시키는 행위에 불쾌감을 드러내고 있다. 이 또한 관점의 대결이다.

관점의 대결은 미국 대선 후보 도널드 트럼프에 대한 엇갈린 여론에서도 나타난다. 선거 집회에서 트럼프 지지자와 반대자가 싸우고 있다.

다수는 증오심 부추기기에 불쾌감지금 한국 사회는 북한의 핵과 미사일 그리고 국회의원 선거로 어수선한 분위기다. 특히 선거가 20여일밖에 남지 않았지만 선거판 짜기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판짜기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으로 모색할 수 있다. 그림 3과 그림 4에서 중심은 집단 따돌림을 당하는 위치라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청색 점은 그림 4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림 3과 같은 판을 짜려고 노력하는 반면, 황색 점은 그림 3을 대체할 그림 4와 같은 판을 그리려 할 것이다. 판을 어떻게 짜느냐에 따라 따돌림을 당하는 자가 뒤바뀐다.


물론 관점을 대체하려거나 혹은 확산시키려 한다고 해서 반드시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관점에 충실한 사실들이 수반되어야 관점은 받아들여진다. 더구나 정치에서 매우 중요한 타이밍의 계산은 경험적 관찰에 근거한 지동설과 같은 정돈된 그림에서 계산하기 쉽지, 천동설과 같은 복잡하고 주관적인 그림에서는 어렵다.


국제관계에서도 역지사지의 관점이 필요하다. 함께 살아가야 하는 곳에서 아전인수(我田引水)의 관점은 갈등을 유발한다. 누가 더 가깝고 누가 더 멀고는 기준점에 따라 달라진다. 자기중심적 관점에서는 남들이 모두 자신과 멀게만 보인다. 타자의 관점에서 보면 남과 함께 갈 수 있는 공통분모를 쉽게 찾을 수도 있다. 코페르니쿠스의 시대뿐 아니라 모든 시대, 관점을 전환하면 세상이 바뀐다.


김재한한림대 정치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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