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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해져야 시작된다, 사랑도 그렇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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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1호 22면

일러스트 김옥

행동경제학의 창시자 대니얼 카너먼의 ‘손실회피’ 이론이라는 게 있다. 그는 자신의 경제학 이론으로 노벨상을 받았는데, 이 이론을 거칠게 정리하면 이렇다. 대부분의 인간은 이익으로 얻는 즐거움보다는 손실로 얻는 고통을 2배 정도 더 크게 느낀다는 것. 핵심은 이것이다. (좋은 것을) 얻지 못해도 좋다. (나쁜 것이라도) 잃는 것은 원치 않는다! 인간이 익숙한 불행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는 이유의 방점도 ‘불행’이 아니다. ‘익숙함’에 있는 것이다!


익숙함은 생각보다 과소평가된 감정이다. 내가 보기엔 절대적으로 그렇다. 가령 매일 같은 가게에서 똑같은 음식만 고집하는 것이나, 비슷하게 생긴 여자나 남자를 만나 연애하는 걸 ‘지루하거나’ ‘상상력이 없는’ 사람이 가진 특징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 식이다. 아마도 우리가 모험과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세계 속에 젖어 살다 보니 생긴 부조화일지도 모르겠다(특히 소비문화가 그렇다).


최근 뉴욕타임스에서 ‘사랑에 빠지고 싶다면’이란 흥미로운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이 기사는 사랑에 빠지기 위해 필요한 36개 질문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심리학자 아서 아론이 개발한 36개 질문의 핵심 역시 ‘친밀감’이다. 친밀감을 형성하는 방법에 초점을 둔 것이다. 연애란 말할 것도 없이 ‘나’와 ‘너’가 만나 ‘우리’라는 정체성을 만드는 과정 중에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므로 낯선 사람을 자기 정체성의 일부로 만들기 위해 우리는 본능적으로 나와 ‘비슷한 점’을 찾기 마련이다.


가령 가슴 아프게 헤어진 전 여자 친구와 같은 직업을 가졌다는 이유로, 10년 전 우연히 인도를 여행했다가 택시 기사에게 사기를 당했다는 이유로, 어릴 적 같은 동네에 살았다는 이유만으로도 우리는 상대에게 쉽게 호감을 느낄 수 있다. 중요한 건 이것이다. 그 ‘같음’이 분명히 좋았던 기억이 아니더라도(전 여자 친구의 직업이 작가라 자신의 온갖 단점을 우스꽝스런 방식으로 작품에 반영해 썼을 수도 있다!), 우리는 그것에서 명확한 친밀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익숙하기 때문에 오히려 편안함을 느낀다.


방어적인 남자와 적극적인 여자가 만나영화 ‘실버 라이닝 플레이북’의 주인공 팻과 티파니는 친밀감을 느낄만한 어떤 성격적·외모적 유사성을 갖고 있지 못하다. 심지어 팻은 지나치게 방어적이고, 티파니는 너무 적극적이다. 처음 식당에서 저녁을 같이 먹는 장면에서 팻은 그것이 ‘데이트처럼 보일까봐’ 일부러 시리얼을 시켜 먹을 정도다. 하지만 티파니는 그와 빨리 친해지고 싶어서 가장 친한 친구에게조차 털어놓을 것 같지 않은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해버린다. 팻이 묻는다.


어쩌다 실직했어요?회사 사람 전부랑 잤어요전부랑?토미가 죽고 굉장히 우울했어요. 얘기 안 해도 돼요!고마워요.


몇 명이랑? 11명.여자도 있었어요?네.진짜요?네. 어땠어요?끝내줬죠! 맙소사.


사실 이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점은 딱 하나다. 팻은 아내의 불륜 현장을 목격하고 정신병원에 입원한 전력이 있다. 그런데도 헤어진 아내를 잊지 못해 주위를 서성대다 법원에서‘접근 금지’ 통보를 받은 상태다. 그는 아내에게 자신의 마음을 담은 편지를 전달하고 싶지만, 아내는 공격적으로 변한 전 남편을 만날 생각이 전혀 없다.


티파니는 남편을 갑작스레 교통사고로 잃었다. 그녀는 아무하고나 술을 먹고, 아무하고나 자는 생활을 반복한다. 둘 다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을 잃어버리고 표류 중인 셈이다. 이것이 이들에겐 유일하게 친밀감을 형성할 수 있는 지점이다. 팻은 아내에게 ‘심리적’으로 살해당했고, 티파니의 남편은 ‘실제로’ 죽어버렸다는 것. 어떤 면에선 그들의 아내와 남편은 무책임하게 그들을 벼랑 끝까지 몰고 갔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실버 라이닝(silver lining)’은 구름의 하얗게 빛나는 테두리를 의미한다. 최악의 경우라고 해도, 언젠가 쨍하게 해 뜰 날이 올 거란 말을 할 때 쓰인다. 그러니까 ‘실버 라이닝 플레이북’은 제목만으로 내용을 유추해볼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아내의 불륜과 남편의 죽음으로 피투성이가 된 남녀가 만나 어떻게 서로의 상처를 보듬고, 사랑에 빠질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인 것이다.


인간이 인간에게 내미는 손길하지만 과정이 순탄치 않다. 이들은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거린다. 티파니의 입에서 “당신 지금 내가 미쳤다고 생각하는 거죠? 와이프한테 댁이 쓴 편지 대신 전해주겠다는 말 취소에요. 젠장!” 같은 대사들이 거침없이 쏟아져 나오는 식이다.


그래서 이 영화가 선택하는 방법이 ‘춤’이다. 여자는 자신과 함께 댄스 경연대회에 출전하면 아내와 재결합하는 일을 도와주겠다고 남자를 압박한다. 아내 때문에 미치기 일보 직전인 남자는 여자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어색한 상황이지만 일단 타협한 것이다.


이들은 어정쩡하게 춤을 연습하기 시작한다. 경연대회까지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극도의 긴장 속에서 스텝을 맞추기 위해 수도 없이 서로의 발을 밟거나, 넘어지길 반복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비로소 음악에 맞춰 서로의 눈을 바라볼 수 있게 되자, 모든 것들이 마술처럼 흘러간다. 이때, 춤을 춘다는 건, 각자의 눈과 어깨와 허리와 온몸을 음악 안에서 느끼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연애의 매커니즘과 정확히 일치한다.


‘나’와 ‘너’가 만나 ‘우리’가 되는 것. 팻은 티파니에게 사랑을 느낀다. 자신도 모르게 어느새 사랑에 빠진 것이다.


스페인 속담 중에 ‘사랑을 속삭이려면 투우장에서!’라는 말이 있다. 사랑에 빠지고 싶다면 놀이공원에 가라는 연애 개발서의 충고 역시 심리학적으로 틀리지 않다. 45층 높이에서 엘리베이터 안에 갇혀있거나 놀이공원에서 위험천만한 놀이기구를 탔을 때, 우리는 쉽게 흥분한다. 위험한 상황에서 흥분하는 건 그때 옆에 있던 상대가 매력적이라기보다 실제 공포 상황 때문이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종종 상대의 매력 때문이라고 착각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팻은 어떨까?


뇌과학과 사회 심리학이 밝혀낸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인간의 감정은 우리 생각처럼 정직하게 반응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가령 슬픔이나 분노, 기쁨은 각기 전혀 다른 감정들이지만 ‘흥분되거나’ ‘눈물이 흐른다거나’ ‘떨리는’ 생리적인 반응은 모두 동일하다는 게 정설이다. 인간은 생리적으로 흥분해 있다는 사실만으로 자신이 현재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정확히 아는 게 불가능하다(나는 외로움을 허기로 착각해서 폭식증에 시달리는 사람을 여럿 봤다). 중요한 건 자신의 감정을 ‘인지적’으로도 아는 일이다. 즉, 지금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이 분노 때문인지 사랑 때문인지 알아내는 것이다.


마음이 꽁꽁 얼어 닫힌 사람들에게 매개는 언제나 중요하다. 만약 팻이 티파니와 춤을 추지 않았더라면 그는 마음을 열었을까? 바람 때문에 미친 듯이 흔들리는 계곡의 구름다리 위에서 낯선 남자와 여자가 우연히 함께 걷게 됐을 때, 남자는 두려움에 꼼짝도 하지 못하는 여자의 손을 어느새 붙잡게 된다. 평소 의심이 많았던 여자라도 이런 상황에선 낯선 남자의 손길을 진심으로 고마워한다. 그것이 진짜 낭떠러지든, 심리적 낭떠러지든, 인간이 인간에게 내미는 손길에는 모두 ‘체온’이 묻어있다. 그것을 온전히 느낄 수 있다면,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 번’ 사랑에 빠질 수 있다. 팻과 티파니처럼. ●


백영옥 ?광고쟁이, 서점직원, 기자를 거쳐 지금은 작가. 소설『스타일』『다이어트의 여왕』『아주 보통의 연애』 , 인터뷰집 『다른 남자』 , 산문집『마놀로 블라닉 신고 산책하기』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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