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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리스마 있고 온화한 여성 임원 닮고 싶어” 여자가 여자에게 매료되는 ‘걸 크러시’ 바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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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대기업 과장 한모(34·여)씨는 요즘 자기도 모르게 같은 팀의 여자 선배인 김모(40) 차장을 자주 훔쳐본다. 이전까진 남자 상사에게서나 느꼈을 카리스마를 김 차장에게서 발견했기 때문이다. 김 차장은 자기 주장이 명확하면서도 따스한 인간미까지 갖췄다. “특히 선배가 상사에게 보고를 하거나 업무 관련 전화를 하는 모습을 유심히 봐요. 예의를 갖추면서도 자기 의견을 똑 부러지게 제시하는 걸 보면서 ‘나도 저렇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세상 속으로] 여성 롤 모델 찾는 여성들
걸크러시, SNS서 올해 5만 건 언급
알파걸과 달리 성공보다 독립성 추구

#.지난해 한 중견기업으로 이직한 조모(33·여)씨는 직장 생활을 하면서 처음으로 닮고 싶은 여성 임원을 만났다. “여성 임원이 드물기도 했지만 ‘멋지다’는 인상을 받은 건 이분이 처음이에요. 업무에선 카리스마 넘치면서도 성품은 온화해서 직원들을 따뜻하게 품어 줘요.” 조씨는 “그분을 본받고 싶은 마음에 말투나 미소까지 따라 하게 되더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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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계에도 당당한 말투와 자신감 넘치는 행동으로 여성팬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여성 연예인이 많다. 왼쪽부터 가수 제시, 개그우먼 김숙, 배우 김혜수. [중앙포토, 사진 tvN·RBW]

여자에게 매료된 여자들, ‘걸 크러시(Girl Crush)’ 현상이 사회·문화 전반에 번지고 있다. 걸 크러시는 ‘여자(Girl)’와 ‘반하다(Crush)’가 합쳐진 말이다. 개그맨 윤정수와 함께 JTBC ‘님과 함께’에 출연 중인 김숙은 연예계의 걸 크러시를 이끈 대표 주자로 꼽힌다. “어디서 너 남자짓이야” “나의 이상형은 조신하게 살림하면서 문제 푸는 남자거든요. 얼마나 조신하고 예뻐요”처럼 남녀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는 발언들을 쏟아내 여성 시청자들로부터 “통쾌하다”는 반응을 얻고 있다.

직장에선 힘들 때 기대고 조언을 구할 수 있는 ‘롤 모델’ 여성이 걸 크러시 대상이 된다. 범죄수사물 ‘시그널’(tvN)에서 김혜수가 연기한 여형사 차수현처럼 당당하게 말하고 행동하는 이들이다. 직장인 김진경씨는 “여자 선배들이 출산·육아 등으로 휴직하거나 퇴사하는 경우가 많아 의지하고 배울 만한 분을 찾기가 쉽지 않다”며 “그러다 보니 존경스러운 여선배를 만나면 마치 아이돌 팬의 마음으로 응원하게 된다”고 했다.

중앙일보가 빅데이터 분석업체 다음소프트에 의뢰해 블로그 약 7억7137만 건, 트위터 85억7159만 건을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2011년 1월 1일부터 올 3월 10일까지 ‘걸 크러시’가 언급된 횟수는 총 10만5645건이었다. 이 중 절반가량(5만759건)이 올해 초부터 쏟아져 나왔다. 1차적으론 걸그룹 마마무가 올해 초 ‘걸 크러쉬’란 노래를 발표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노래 가사엔 ‘나도 충분히 벌어’ ‘남들 시선 의식 안 해’처럼 독립적인 여성의 모습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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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그룹 마마무. [중앙포토, 사진 tvN·RBW]

거꾸로 마마무의 노래가 사회 전반의 걸 크러시를 반영한 측면도 있다. 2014년 2126건에 그쳤던 걸 크러시 언급은 지난해 5만2244건으로 급증했는데, 특히 11월에 활발했다(1만2829건). 김숙의 ‘님과 함께’와 여성 래퍼들의 대결을 다룬 ‘언프리티 랩스타’ 시즌2가 화제 속에 방영되던 시기와 일치한다. 이 즈음 해서 SNS에서 걸 크러시라는 말이 신조어처럼 퍼지기 시작했다.

걸 크러시는 또 다른 여성 관련 신조어 ‘알파걸’과 비교할 때 결과보다는 관계에 방점이 놓인다. 알파걸은 곧잘 ‘엄친딸(엄마 친구 딸)’과 연관되면서 ‘성공한 여성은 나와는 다른 특별한 사람’이라는 인식을 준다. 반면 걸 크러시에선 ‘나도 본받고 싶다’는 욕구가 읽힌다. 신경아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는 “알파걸이 사회적 성공 자체에 중점을 둔다면 걸 크러시는 평범한 여성의 독립성 추구 같은 내면을 반영하는 현상”이라고 설명했다.

걸 크러시 현상이 지난해 ‘여혐(여성 혐오)’ 현상의 반동으로 나타난 ‘페밍아웃(페미니스트+커밍아웃)’과 연관된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여성이 여성을 좋아하는 현상은 예전부터 있었다”며 “요즘 걸 크러시에서 주목할 것은 여성이 여성을 응원하는 일이 공개적이고 대중화됐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여성이 여성을 지지하고 롤 모델로 선언하는 행위를 통해 ‘여혐’ 흐름에 반대하고, 기존 페미니스트들에게 연대감을 표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지난해 SNS에서는 자신이 페미니스트임을 밝히는 ‘#나는 페미니스트다’ 해시태그 달기 운동이 펼쳐져 남녀를 불문하고 많은 이용자가 적극적인 ‘페밍아웃’을 했다.

‘페밍아웃’ 현상은 관련 도서 판매량에서도 확인된다. 지난해 ‘맨스플레인(Mansplain·남자들이 여자에게 잘난 척하며 가르치려 드는 행태)’이란 신조어를 알린 리베카 솔닛의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는 지금까지 1만7000권 이상 팔렸다. 올해 초 나온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의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는 출간 두 달 반 만에 8000부가 팔렸다. 온라인서점 예스24 집계에 따르면 『남자들은…』은 30·40대 여성의 구매율이 43%로 가장 높았지만, 40대 남성(11.1%)과 30대 남성(10.6%)도 적지 않게 구매했다.

교보문고 전략구매팀 박정남 과장은 “예전의 여성주의 책들처럼 딱딱한 학술서가 아니라 생활밀착형 책들이 속속 출간되면서 독자층이 확산되는 추세”라고 설명했다. 이나영 교수는 “페미니즘 수업에서도 남학생의 적극적인 참여가 눈에 띄게 늘었다”며 “지난해 극에 달했던 여혐 현상이 남학생들에겐 ‘성차별에 대한 각성’을, 여학생들에겐 ‘바람직한 여성상에 대한 고민’을 끌어낸 것 같다”고 해석했다.

임선영 기자 youngcan@joongang.co.kr

“걸그룹 마마무 팬 70~80%가 여성 … 멤버들 털털해 좋아해”

‘걸 크러시’는 영국 옥스퍼드 사전에 올라 있는 용어다. ‘한 여성이 다른 여성에게 느끼는, 일반적으로 섹슈얼한 감정이 동반되지 않는 강렬한 호감 혹은 감탄’을 뜻한다. 이 용어가 대중에게 퍼지기 시작한 건 2012년께다. 미국의 유튜브 스타인 제나 마블스가 “성적인 감정 없이도 같은 여자를 좋아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걸 크러시’란 표현을 썼다. 국내에선 2015년부터 확산됐다. 그 이전까지는 여성이지만 여성 연예인을 좋아하는 경우 ‘여덕(여성 덕후)’이라 불렸다.

다음소프트의 분석 결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걸 크러시와 관련해 가장 많이 언급된 인물은 마마무(6375건), 포미닛(5017건), 김숙(2353건) 등이었다. 걸그룹 마마무의 소속사 RBW 관계자는 “마마무 팬의 70~80% 정도가 여성”이라며 “여성이 공감할 만한 가사가 많고, 멤버들의 털털하고 솔직한 모습을 좋아해주는 것 같다”고 말했다.

여성에게 걸 크러시가 있다면 남성에겐 ‘브로맨스(브러더+로맨스, 남성과 남성 간의 친밀한 감정)’가 있다. 드라마 ‘태양의 후예’에서 특전사 동료인 대위 유시진(송중기)과 상사 서대영(진구)의 장난기와 동료애 섞인 우정이 대표적인 브로맨스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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