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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정덕구의 NEAR 와치

단절의 시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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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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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덕구
NEAR재단 이사장

한국이 다면(多面) 융·복합 위기 속에서 본격적인 정체기에 진입하고 일본형 장기 불황의 경로를 따라가고 있다는 데 대해 여러 가지 근거가 쌓여가고 있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그 경로를 끊고 과거와 단절해 새로운 추월의 시대를 열어야 한다. 그러나 이 대(大)반전을 가로막는 최대의 장애물은 취약한 정치 리더십과 낙후된 정치로 꼽힌다.

지난 30여 년에 걸쳐 우리는 두 차례의 매우 중요한 전환기의 관리에 실패했다. 제1차 전환기는 1980년대 중반 이후 97년 외환위기까지로, 박정희식 개발경제에서 벗어나 시장화·개방화로 전환되는 시기였다. 이러한 1차 전환기 관리의 실패로 우리는 97년 동아시아 위기 때 가장 큰 피해자가 되었다.

제2차 전환기는 21세기 초반 이후 글로벌 위기를 거쳐 최근에 이르기까지 약 10년에 걸쳐 진행되어 왔다. 이 기간은 중화학·IT·부품소재 중심의 주력 제조업이 경쟁력에 한계를 보이며 벽을 뛰어넘어야 하는 고난도 과제를 우리에게 제시했다. 바로 과감한 산업구조의 혁신과 기술력의 천장을 뚫어 기술생태계를 획기적으로 변화시켜야 하는 전환의 시기였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제2차 전환기 관리에 또 한 번 실패하며 어렵게 맞이한 추월기를 오래 유지하지 못한 채 정체기에 본격 진입하게 되었다. 특히 이 기간 동안 국내 정치가 과잉이념화되고 파당정치에 골몰하는 바람에 구조적 전환기를 이끌 정치 리더십이 실종되면서 정체현상이 더욱 구조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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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김회룡]

노무현 대통령은 세상을 평평하게 하는 데 몰두하고, 이명박 대통령은 4대 강 개발에 모든 것을 걸었다. 그리고 정치 리더십이 극도로 약화된 5년 단임 대통령들은 국민 전체가 아닌 자파 세력에 업혀 정권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정치가 이념경쟁 속에서 당파 싸움에 휘말렸고 스스로 정체성의 위기에 빠졌다. 이 혼란 속에서 우리 경제사회가 제2차 전환기에 진입하고 있다는 사실과 정체기에 진입하는 것도 직시하지 못했고, 중국 특수·삼성 특수에 의지하며 착시현상에 빠졌다. 정체기에 들어서면서 경제사회심리는 극도의 침체 속에 가라앉고 국민들은 미래에 대한 도전보다는 이기적 생존본능에 빠져 기득권 세력이 만든 거대 담합구조 내에서 소외되지 않으려고 몸부림쳤다. 젊은이들은 옛날보다 훨씬 많은 공부와 투자를 했는데도 사회 진출이 더욱 어려워졌고, 좌절과 분노 속에 스스로 위축되고 있다.

세계 경제가 깊은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중국 등 세계 주력 국가들의 구조적 침체가 지속되면서 한국은 아주 다른 처방과 백신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실사구시적인 산업구조조정, 경제생태계의 복원 등 근원적 처방에는 손을 대지 못한 채 관념적이고 회임기간이 너무 긴 창조경제로 대응했고, 그사이 한국의 정체기는 더욱 빠르게 진행되어 왔다. 정치정책 프로세스의 생산성은 바닥 수준으로 떨어졌고, 국가권위 체제에 대한 신뢰 상실이 두드러졌다. 5년 단임 정치의 전리품을 챙기느라 인사의 난맥상이 벌어지면서 큰 인재, 큰 인물이 쉽게 등장하기 어려운 인물생태계가 생성되었다.

중국의 재등장과 팽창주의의 여파로 한국은 미·중 사이에서 외교적 고뇌에 빠지게 되었다. 최근에는 한반도 문제를 놓고 미·중의 이해관계가 상충되고 서로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 대북정책에 틈새가 커졌다. 이 벌어진 틈새는 김정은 정권의 간만 키워놓았고, 최근 미사일·핵실험 사태 이후 한반도에는 안보위기감이 증폭되고 있다.

이렇게 한국은 정치·경제·안보·사회적 신뢰·인물 등 다방면에서 위기요인이 커지고, 이들 상호 간에는 융·복합 현상까지 발생하고 있다. 지금 우리는 매우 새로운 큰 그림, 긴 호흡, 생태계 변혁, 최고 전문가들의 결집, 위기관리 체제의 정비 등 새로운 전략 선택을 통해 과거로부터의 과감한 단절과 새로운 출발을 만들어내야 한다. 진정으로 우리 한국에 이러한 단절과 출발을 만들어낼 결단력과 추진력이 있는가?

그 시험대가 이번 20대 총선이며, 이를 통해 과감한 세력교체를 이루는 것이다. 금세기 들어 과잉이념화와 과거회귀로 한국 정치를 유린해 온 민주화 세력의 후예들과, 거대한 담합체계를 지켜주며 그 안에서 안주해 온 산업화 세력의 실패한 후예들이 바로 교체 대상이다. 이번에 이들을 철저히 퇴출시켜 탈이념화하고 실용적 합리주의적 디지털 세력에게 다음 세대를 넘겨줘야 한다. 그러나 요즘 20대 국회에 가보기도 전에 미리 실망하는 국민도 많이 생겨나고 있다. 그들은 공천 등 이번 총선을 준비하는 정치권의 모습을 보며 진정 이것이 우리의 수준인가 하며 자탄한다. 시계추를 임진왜란 전후로 돌려놓은 것으로 착각하게 한다. 이제부터라도 국민 모두가 처절하게 자성하고 자책하며 어두운 세대를 단절해야 한다. 20대 국회 구성에서 국민의 힘을 확실하게 보여줘야 하고 이후에도 철저히 감시해 정치생태계를 생산적으로 바꿔놓아야 한다.

20대 국회의 최대 덕목은 화합과 실용이다. 국가권위 체제에 대한 국민의 신뢰부터 회복하고 스스로 정체성의 위기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박근혜 대통령도 전 국민의 대통령으로서 화합의 구심점이 되고 이러한 단절과 새로운 출발을 이끄는 국가리더십을 발휘해 다면 융·복합 위기를 극복한 대통령으로 역사에 길이 남게 되기를 기대한다. 그 단절과 새로운 출발만이 우리의 미래를 열어가는 쇄빙선이 될 것이다.

정덕구 NEAR재단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