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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연 잊으려 해, 본의 아니게 고통드린 국민께 용서 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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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머지않아 내 육신마저 버리고 떠나야 할 시점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제 지난날의 악연은 깨끗이 잊어버리고 용서하려고 합니다. 그동안 부덕의 소치로 본의 아니게 고통을 국민 여러분께 드린 것도 적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용서해 주실 것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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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 증언록』 출판기념회에서 참석자들이 10일 시루떡을 자르고 있다. 왼쪽부터 나경원 국회 외교통일위원장, 강창희 전 국회의장, 이홍구 전 총리, 박관용 전 국회의장, 홍석현 중앙일보·JTBC 회장, 와타나베 히데오 일·한협력위원회 회장대행, 김종필 전 총리, 정의화 국회의장, 김수한 전 국회의장,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 더불어민주당 김종인 비상대책위원회 대표, 국민의당 안철수 공동대표, 신경식 헌정회장. [사진 전민규 기자]

 90세 노(老)정객의 연설에 청중들은 숙연해졌다. 여성 지지자들은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훔쳤다. 김종필(JP) 전 총리는 10일 오후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김종필 증언록』 출판기념회에서 그렇게 ‘거인’의 퇴장을 스스로 선언했다.

JP, 증언록 출판회서 소회 토로
“머지않아 육신 떠날 시점 다가와
왜곡된 일부 역사 바로잡아 의미
정치, 국가적 어려움 소홀히 다뤄”

김 전 총리는 이날 그간의 소회를 원고에 적어 25분간 읽어 내려갔다. 그는 증언록에 대해 “그간 잘못 알려졌거나 왜곡된 일부 역사적 사실을 바로잡았다는 데서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반세기 전 혁명으로 세상을 뒤엎었던 역사적 빚을 갚았다는 홀가분한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제 이 나라 정치는 한 시대가 저문 것 같다. 제 주변 전우들은 거의 다 세상을 하직하고 개발시대 정치인 중 나 한 사람 남아 있다”며 “아마 정치에 대해 한 말씀 하라고 아직 남겨준 것 같다”고 퇴장사를 시작했다.

그가 현실정치에 던진 마지막 조언은 공자가 남긴 ‘사무사(思無邪·생각에 사악함이나 못된 마음이 없어야 한다)’였다. 김 전 총리는 “우리 정치가 목전에 닥친 선거 때문인지는 몰라도 갖가지 산재한 국가적 어려움을 소홀히 다루는 것 같아 안타깝다. 정치가 국민의 안녕을 걱정해야 하는데 오히려 국민들이 정치를 더 걱정하고 있다”며 “민의(民意)의 전당이라는 국회가 본래 기능을 하지 못해 ‘정치 똑바로 하라’는 (국민들의) 소리가 제 귀에도 들린다”고 지적했다.

이어 “국가관 없이는 올바른 정치관이 나올 수 없다. 국가관을 지니지 못한 사람이 권력을 차지하려 한다거나 대통령 되는 꿈만 꿔서는 어떻게 되겠느냐”며 “국민과 국가의 영생을 바란다면 작은 당리당략은 뒷전에 놔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많은 분들을 이렇게 한자리에서 뵙고 인사를 나누는 기회는 앞으론 없지 않나 생각하니 섭섭한 마음도 금할 길 없다”며 “지난 세월 동안 고난을 감내하며 조국 발전에 땀 흘리며 함께해 주신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께 엎드려 감사드린다”고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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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박정희·3김시대 관통한 최후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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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대중 연설을 마치고 무대를 내려온 김 전 총리에게 지지자들이 몰려들었다. 그러곤 차를 타고 떠날 때까지 그의 이름을 연호했다.

출판기념회에는 김 전 총리의 귀거래사(歸去來辭)를 듣기 위해 정계·재계·문화예술계 등 1000여 명의 인사가 참석했다. 김 전 총리와 친교를 맺어온 나카소네 야스히로(98·中曾根康弘) 전 일본 총리는 와타나베 히데오(渡邊秀央) 일·한협력위원회 회장대행을 보내 축사를 전했다.

홍석현 중앙일보·JTBC 회장은 축사에서 “많은 회고록이 민감하고 미묘한 문제를 피해 가느라 평범하고 한가했지만 JP는 우회하지 않았다. 격동의 순간을 솔직하고 실감나게 증언해 과거 어떤 회고담보다 현장성이 뛰어났다”고 말했다. 정의화 국회의장은 ‘정치는 허업(虛業)’이라는 김 전 총리의 발언을 인용해 “권력의 정점부터 역경의 세월을 겪은 후 세상만사 이치를 터득해 이른 심오한 결론”이라고 했다.

글=이지상 기자 ground@joongang.co.kr
사진=전민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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