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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톡] 감독들의 악역 작명법…“얄미운 사람 이름 따왔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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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취재하며 여러 감독을 만나 대화한다는 것은 그들의 창작의 고통을 간접 체험하다는 것이다. 약간의 즐거움과 엄청난 스트레스가 뒤섞인 풀 스토리를 듣고 나면, 영화감독 안 하길 잘했어, 이런 생각이 들 때가 많다. 물론 재능도 없고 누가 시켜주지도 않았겠지만 말이다.

연출만 아니라 시나리오까지 직접 쓰는 경우라면 창작의 고통은 더 커진다. 거기에는 주인공의 이름짓기도 포함된다. 관객 입장에서는 무심코 넘기는 주인공의 이름이지만, 나름대로 다 이유와 사연이 있다. 작명의 ‘팁’을 가진 감독들도 있다.

전도연·공유 주연의 멜로물 ‘남과 여’의 이윤기 감독은 작명에 앞서 휴대폰부터 뒤진다고 했다. 실제 아는 사람 이름을 따온다는 것이다.

“제일 먼저 휴대폰에 저장한 전화번호부를 뒤져요. 적절한 이름을 찾는 거죠. 전도연씨가 맡은 상민 역은 왠지 조금 남자 같은 이름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제 지인 중에 이상민이라는 여자가 있어요. 공유씨가 맡은 기홍도 잘 아는 후배 이름이에요. 걔 성격도 극 중 기홍처럼 애매해요.”

‘베테랑’으로 국민 대표 밉상이 된 제벌3세 악역 조태오(유아인)는 류승완 감독이 “평소 얄밉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이름에서 글자를 따와 조합”한 것이다. 류 감독은 과거 자신의 영화에 출연한 동생 류승범에게 줄기차게 상환이라는 이름을 붙여줬는데, 언젠가 그 이유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중학생 때였나. 만화를 보면서 이현세의 설까치, 허영만의 이강토처럼 예술가에겐 자기만의 페르소나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난 앞으로 영화를 찍을 거니까 그런 이름이 하나쯤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그때 떠올린 이름이 상환이에요.”

국내 최초로 구마의식을 소재로 한 영화 ‘검은 사제들’. 장재현 감독에 따르면 강동원이 연기한 최준호 부제의 이름은 ‘준비된 호랑이’를 줄여 지은 것이다. 김윤석이 맡은 김범신 신부는 ‘호랑이들의 신’이라는 뜻. 구마사는 범띠여야 한다는 극 중 설정에 충실한 이름 짓기였다.

오늘도 주인공 이름 짓기에 골머리를 앓고 있을 수많은 창작자들의 파리한 얼굴이 떠오른다. 그들에게 전화번호부로부터, 짜증나는 주변인으로부터, 줄임말로부터 한줄기 소중한 영감이 비치길.

이은선 기자 har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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