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 설계·감리 분리는 나쁜 건물 만드는 시스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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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8호 6 면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이 개관 30주년을 맞았다. 건물을 설계한 김태수 건축가도 올해로 팔순이 됐다. 이를 기념하는 건축전 ‘김태수’전(2월 19일~6월 6일) 개막 행사를 위해 과천관을 찾은 노 건축가는 만감이 교차한다는 표정이다.


“진입로에 있던 어린 느티나무가 이젠 고목이 되었더군요. 설계하고 완공했을 때도 마음에 들었지만 주변 나무들이 자라 미술관을 감싸니 그 모습이 또 굉장히 아름답네요.”


88올림픽을 앞두고 만들어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은 서울에서 동떨어진 위치 때문에 당시 ‘전시행정의 대표물’, ‘애물단지’란 따가운 시선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어린아이부터 노부부까지 함께 찾는 명소가 됐다. 청계산 자락의 울창한 숲 사이에 자리한 과천관은 건축가가 고집스럽게 사용한 화강암에 세월의 흔적이 쌓이면서 운치를 더하고 있다.


서울대 건축과를 나온 김태수는 석사과정을 끝내고 1962년 20세기 최고 건축가 중 한 명인 루이스 칸이 있는 미국 예일대로 향했다. 그가 도착했을 때 루이스 칸은 떠나고 없었지만, 예일대의 분위기는 그에게 문화적 충격이었다.


“외국 친구들은 어릴 때부터 철학을 배우며 다양한 생각과 미적 감각을 키워왔더군요. ‘세계 건축사’ 강좌도 있었는데, 한국에서는 그런 과목을 배울 기회가 없었죠. 서울대를 나왔지만 철학적 사고도 부족하고 그들을 따라가기도 쉽지 않아 한때 방황했습니다.”


그는 ‘나’를 찾는 일에 매달렸다. 자신을 제대로 알아야 비로소 자신만의 고유한 건축 세계가 열릴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초가집을 떠올렸다. 어릴 적 고향 경남 함안에서 보던 초가집. 초라해 보이지만 자연의 품에 안겨 있는, 여러 채가 모여 한 폭의 그림이 되는 초가집. 그 소박한 아름다움을 콘셉트로 삼은 졸업 논문은 모여있는 초가집들이 자연과 어우러진 ‘파노라믹 뷰’였다.


그는 과장과 장식을 빼고 최소한의 설계로 집을 만들었다. 70년대 저소득층을 위한 공공주택 ‘밴 블럭 주택’을 시작으로 80년대 들면서 세계 건축계에 조금씩 이름을 알려갔다. 80년 하트포드시에 지은 자택은 ‘미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10대 주택’에 선정됐고 82년에 지은 미들베리 초등학교는 미국건축가협회 최고상을 받기도 했다.


이후 미국 해군 잠수함 훈련시설, 튀니지 미국대사관, 블룸필드 유치원 등을 잇달아 설계했다. 한국활동도 본격화했다. 국립현대미술관에 이어 교보연수원, LG화학기술 연구원, 금호미술관을 선보였다.


하지만 미국과 한국은 건축가에 대한 인식 자체가 달랐다. “한국은 건축물을 설계한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미국이나 유럽은 이 건물이 누구의 작품이란 인식이 강해요. 현대미술관조차 입구에 제 이름이 쓰여있지 않더군요.”


건축 설계와 감리가 분리되지 않던 당시 그는 국립현대미술관의 설계부터 완공까지 책임졌다. 어떤 재료를 쓸 것인지, 설계에 따라 건축이 잘 되고 있는지 등을 직접 관여했다.


“미국을 비롯해 세계 많은 나라에선 건축가가 모든 것을 책임집니다. 하지만 20여년 전 생긴 한국의 설계와 감리 분리 시스템은 나쁜 건물을 만들어내는 가장 안 좋은 시스템이죠.”


원로 건축가로서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미국은 ‘건축가를 사용한다’는 개념이지만, 한국은 ‘내 돈을 주고 건축가의 디자인을 산다’고 생각합니다. 그 둘은 굉장한 차이가 있습니다.”


건축주가 돈을 주고 디자인을 샀으니 건물을 지을 땐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한국 건축계의 잘못된 관행을 꼬집은 말이다. 건축가가 책임질 수 있는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건축 설계자 선정 방식에 대해서도 문제를 지적했다.


“건축가의 기존 업적만으로 평가하는 시스템이 문제죠. 대기업에서 건물을 지을 때면 회장이 유명 건축가 섭외를 지시하고, 직원들은 건축에 대해 잘 모르니 일단 해외 건축 업적이 있는 외국 사람을 찾습니다. 하지만 이건 잘못된 것이죠. 우선 국내 건축가가 대규모 프로젝트를 할 기회가 굉장히 적거든요. 업적에 따른 단순한 평가는 왜곡된 선택이 될 수 있습니다.” ●


글 오이석 기자 oh.iseok@joongang.co.kr사진 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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