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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교양] '삼한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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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한지 1·2/김정산 지음, 중앙 M&, 각권 8천5백원

월탄 박종화가 번역한 『삼국지』를 밤새 읽어나가던 중학생은 학교에서 친구들을 만나 전날 읽었던 소설 속 영웅들의 이야기를 주고받는게 큰 즐거움이었다.

관우·장비가 죽어나가는 대목에서는 밥도 먹지 못할 정도로 슬펐다. 한편으로 의아스런 점은 왜 우리나라에는 중국의 『삼국지』같은 스펙터클한 역사소설이 없는가 하는 것이었다.

소년은 자라나 소설가가 됐고 어렸을 적 '삼국지' 독서체험에 자력처럼 이끌려 한국판 삼국지같은 대작을 써보기로 결심했다.

소설가 김정산씨는 자연스럽게 고구려.백제.신라가 통일을 놓고 격돌하다 결국 신라가 승리하는 580년에서 676년까지의 시기에 관심을 갖게 됐다.

작품 구상에서 자료수집, 수많은 사료분석을 거쳐 집필까지 10년이 걸린 결과물이 역사소설 '삼한지'다. '삼한지'란 제목을 선택한 이유는 '삼국지'와 차별화하기 위해서다. 김씨는 전체 10권, 원고지 1만2천매 분량을 지난해 10월 탈고했고 8월까지 순차적으로 완간된다.

소설의 흡인력을 분류하자면 역시 김씨의 가슴 속에 이상적 소설의 전범처럼 자리잡은 삼국지류다. 정권의 정통성을 따져 명분을 다투고, 때와 귀인을 기다려 천하를 도모하는 영웅들의 다채로운 서사가 도도하게 펼쳐진다.

팬터지적 요소도 눈에 띈다.

신라 진지왕의 아들 김용춘의 이복동생인 비형은 우물에서 우물로 땅속을 통과하는 이동 속도가 지상의 말탄 기병보다 빠르고, 귀신떼를 자유자재로 거느리고 부리는 신출귀몰한 존재다.

영취산에 거하는 이승(異僧) 낭지법사는 앉아서 1만리, 서서 9만리를 내다보는 초능력자다. 문리가 트인 김씨의 문장은 역사와 팬터지, 이질적인 요소들을 매끄럽게 교직해낸다.

혹시 '삼한지'는 소설 형식을 통한 역사 교육이라는 역사소설의 일반적인 구도에서 재미 쪽으로 조금 더 나간 것이 아닐까. 김씨는 "쉽고 재미있게 읽혔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중.고등학생들까지 독자층으로 아우르기 위해 낯뜨거운 장면은 삼갔다"고 덧붙였다.

물론 이 작품은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역사소설로서 품격을 잃지 않고 있다. 김씨는 "신라시대를 다룬 수많은 역사서, 경제사를 다룬 책들, 논문, 다소 일면적인 주장을 담은 향토사학자들의 저술 등 방대한 자료를 섭렵했다"고 밝혔다.

소설의 얼개를 구성하는 사실들의 80%는 '삼국사기'에서, 20%는 '삼국유사'에서 취했다고 한다. 소설의 뼈대를 채우는, 등장인물들의 결정과 경험, 세부는 작가적 상상력을 동원했지만 소설의 진행을 위해 사실을 왜곡하는 '무리수'는 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군산의 기지촌 여성을 다룬 단편 '수지'로 1993년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김씨는 10년 넘게 한곳에 정주하지 못하고 전국 방방곡곡을 떠도는 유랑세월을 이어가고 있다.

맘에 드는 곳에 몇 개월에서 길게는 1~2년까지 충동적으로 체류하다 견디기 어려워지면 훌쩍 떠나는 식이다. 그런 성향의 김씨가 십년간 한가지 목표에 매달렸다는 점은 아이로니컬하다.

재미와 교양을 동시에 추구한 김씨가 여름 독서시장과 겨룰 일합이 궁금하다.

신준봉 기자
사진=김경빈 기자<kgbo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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