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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년 전 ‘김의 전쟁’과 일본 헤이트스피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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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이정헌
이정헌 기자 중앙일보 도쿄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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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헌 도쿄 특파원

1968년 2월 20일, 정확히 48년 전이다. 일본 시즈오카(靜岡)현 시미즈(淸水)시 한 클럽에서 총성이 울렸다. 야쿠자 두목과 조직원 등 두 명이 살해됐다. 엽총을 발사한 범인은 재일교포 2세 김희로(본명 권희로·당시 41세). 빌린 돈을 갚으라고 협박하던 야쿠자가 “조센징, 더러운 돼지새끼”라며 욕설을 퍼붓자 분노가 폭발했다. 그의 삶을 짓누르던 차별과 폭력, 일본 경찰의 부당한 대우 등 쓰라린 기억이 한꺼번에 솟구쳐 오른 듯했다.

 총과 다이너마이트로 무장한 김희로는 경찰의 추격을 피해 45㎞ 떨어진 스마타교(寸又峽) 후지미야 온천여관으로 숨어들었다. 주인 가족과 투숙객들을 붙잡고 88시간 동안 인질극을 벌였다. 기자들을 불러들여 회견을 하고 생방송 전화 인터뷰도 했다. 방송국 헬리콥터는 산골마을 인질극을 실시간 중계했다. 일본인들의 눈과 귀가 온통 TV에 집중됐다. 당시 사건이 일본 최초의 ‘극장형 범죄’로 기억되는 이유다. 92년 한국에선 ‘김(金)의 전쟁’이란 영화로 제작돼 극장에서 상영됐다.

 김희로는 “조선인 차별을 고발하기 위해 사건을 일으켰다”며 “조선 민족을 모욕한 경찰은 사죄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결국 시즈오카현 경찰본부장이 공개 사죄했다. 인질극은 기자들 틈에 섞여 진입한 경찰의 체포작전으로 막을 내렸다. 그는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31년간 옥살이를 하다 99년 가석방됐다. 부산으로 이주했고 2010년 81세로 세상을 떠났다.

 인질로 잡혔던 여관 주인 모치즈키 에이코(望月英子·77)는 38년 만인 2006년 서울에서 김희로를 만났다. “이젠 다 용서할 수 있다”고 말했다. “살인범이었지만 우리 식구들에게 피해를 안 끼쳤다”며 “아이 3명에게는 미안하다며 2000엔씩 용돈도 줬다”고 했다. 그는 2010년 여관 한쪽에 ‘김희로 사건 자료관’을 열었다. 하지만 투숙객이 점차 줄면서 2012년 결국 여관 문을 닫았다. 최근 건물도 매각했다.

 일본 사회에 경종을 울린 ‘김의 전쟁’ 이후 반세기가 흘렀다. 사건 현장은 사라졌고 눈에 띄는 차별은 크게 줄었다. 문제는 재일 한국인들을 여전히 위협하는 헤이트스피치(특정 민족·인종에 대한 혐오 발언). 도쿄 신주쿠(新宿) 등에선 “조센징은 조선으로 돌아가라”는 극우단체 시위가 수시로 열린다. 지난달 일본을 방문한 이자크 리타 유엔 소수자문제특별보고관은 “헤이트스피치가 위험한 이유는 제노사이드(집단학살)로 바뀔 수 있기 때문”이라며 “차별금지법 제정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3년 넘게 헤이트스피치 반대운동을 이끌어온 ‘차별반대 도쿄액션’의 일본인 홍보 담당자 우에다 유스케(植田祐介)는 “차별을 취미 활동쯤으로 여기는 우익들이 있지만, 이에 맞서 싸우는 일본인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차별을 절대 허용하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희로의 불행한 삶은 더 이상 반복돼선 안 된다. 차별은 분노를 낳는다. 화합의 새 시대를 기대한다.

이정헌 도쿄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