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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위크]패션계의 철학자 ‘캐시미어 킹’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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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이너 브루넬로 쿠치넬리, 독학으로 습득한 고대인의 지혜로 세상의 아름다움을 지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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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치넬리는 무식한 농부라고 멸시 받던 아버지를 보면서 교육의 중요성을 배웠다.

‘테오프라스투스와 프란치스코회의 수도사들은 자연을 능산적자연(Natura naturans)으로 받아들였다. 조르다노 브루노와 바루크 스피노자에 따르면 그것은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자연으로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만물을 보살피며 치유하는 존재다.’ 패션 디자이너 브루넬로 쿠치넬리는 2016 가을·겨울 시즌 패션 카탈로그의 첫 단락에 이렇게 썼다. 패션 카탈로그에 BC 4세기의 그리스 철학자와 중세의 수도회, 16세기와 17세기의 철학자들을 언급하는 경우가 어디 그리 흔한가?

쿠치넬리는 여느 디자이너들과는 다르다. 그의 패션 카탈로그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복습하고 베르길리우스의 시에 대한 기초 지식을 쌓고 우화적인 풍자를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

앞의 인용문을 패션 용어로 풀자면 올해 겨울은 겹쳐 입기로 액센트를 준 무채색 계열의 ‘자연스러우면서도 고급스런’ 스타일이 유행할 것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쿠치넬리 컬렉션의 특징이기도 하다.

쿠치넬리의 의상을 특별하게 만드는 건 바로 그 자신이다. 보통 패션업체들은 그 당시에 인기가 높은 스타를 브랜드 대사로 내세우지만 쿠치넬리는 19세기 영국 사회비평가 존 러스킨의 정신을 모토로 삼고(2014 봄·여름 컬렉션) 제임스 본드를 매료시킨다. ‘007’ 최신편 ‘스펙터’에서 본드 역을 맡은 대니얼 크레이그는 쿠치넬리 브랜드를 너무도 좋아해 영화 한 장면에서 (본드의 공식 의상협찬 업체인 톰 포드를 제쳐놓고) 쿠치넬리의 갈색 정장을 입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쿠치넬리에게 ‘캐시미어 킹’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하지만 그는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용병대장으로 활동하던 귀족 철학자들과 더 닮았다. 그들은 전쟁터(쿠치넬리의 경우엔 냉혹한 국제 패션계)에서 부를 얻고 은퇴한 후 언덕 꼭대기의 요새에서 사색하고 책을 읽었다. 우주 안에서 인간의 위치와 아름다움에 대해 명상했다.

몇 년 전 처음으로 쿠치넬리를 만났을 때 그는 이탈리아 페루자의 언덕 꼭대기에 있는 중세 마을 솔로메오의 복원 작업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는 그곳에 극장과 도서관을 짓고 버려진 마을에 새 생명을 불어넣었다. 쿠치넬리를 직접 만나 보니 캐시미어 스웨터로 성공한 사업가로서 내가 예상했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하루 종일 그와 이야기를 나눠 보니 고대 로마의 하드리안이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처럼 지성과 인간성, 연민과 겸손으로 삶에 접근했던 인물에 대한 연구를 위해서라면 패션 사업을 기꺼이 접을 수도 있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었던 쿠치넬리는 고대인의 지식과 지혜를 독학으로 습득했다. 1950년대에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이탈리아 시골에서 자라다가 10대 중반쯤 온 가족이 도시로 이사했다. 아버지는 시멘트 공장에 일자리를 얻었다. 그는 아버지가 공장에서 일할 때 몹시 불행했던 것을 기억한다. 아버지는 그곳에서 무식한 농부라고 멸시 받았다. 그 일로 마음에 큰 상처를 받은 쿠치넬리는 교육을 다른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게 됐다.

쿠치넬리는 숱 많은 짙은 금발에 얼굴이 잘생겼고 늘씬한 체격을 지녔다.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웃는 모습이 매력적이다. 젊은 시절에는 이탈리아 스포츠 브랜드 엘레세의 모델로 일했다. 니트웨어 상점에서 일하는 아가씨를 좋아한 것이 캐시미어 사업에 발을 들여놓는 계기가 됐다.

처음엔 다양한 색상의 여성용 캐시미어 의류를 만들다가 남성복에 관심을 갖게 됐다. 1997년 프랑스 생 트로페즈에 자신의 이름으로 첫 번째 상점을 열었다. 몇 년 뒤엔 니트웨어를 뛰어넘어 토털 룩(의상의 전체적인 조화를 추구하는 스타일) 분야로 사업을 확장했다. “기본적으로 내가 갖고 있는 의상을 참고해 그것들을 시대감각에 맞게 변형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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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치넬리는 남성들에게 정장 재킷이나 블레이저 위에 길이가 짧은 조끼를 겹쳐 입는 멋을 선사했다.

이렇게 해서 이른바 ‘스포티브 시크 루소(Sportive Chic Lusso)’ 스타일이 탄생했다. ‘단추가 한 줄 반으로 된 블레이저’(단추가 두 줄인 스타일과 유사하지만 겹여 밈 부분이 더 좁다), 발목 부분에서 접어 올린 짧은 카고 팬츠, 자연스런 무채색 계열의 색상이 특징이다. 물론 그의 장기인 조끼를 빼놓을 수 없다.조끼는 쿠치넬리가 다른 어떤 디자이너보다 더 잘 만드는 아이템이다. 캐시미어, 퀼티드 스웨이드, 플란넬, 양가죽, 덕다운이나 구스다운, 방수 처리한 나일론과 모 혼방 소재 등 어떤 재료든 멋지게 만들어낸다. 나일론과 면 혼방의 투톤 컬러 원단을 사용하기도 한다. 앞 여밈은 지퍼나 단추로 마무리한다. 목까지 올라오는 스타일이 있는가 하면 전통적인 조끼와 같은 V넥이나 라운드넥도 있다. 다운의 중량은 조끼를 재킷이나 외투 안에 입을 것인지 몸에 꼭 맞는 캐시미어 스포츠 재킷 위에 겹쳐 입을 것인지 용도에 따라 결정된다. 쿠치넬리는 남성들에게 정장 재킷이나 블레이저 위에 길이가 짧은 조끼를 겹쳐 입는 것이 그냥 괜찮을 뿐 아니라 멋지다는 확신을 심어줬다. 그의 천재성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쿠치넬리는 그 스타일을 정말 멋있게 만들었다. 패션 카탈로그를 철학 논문처럼 제작해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도록 만들었듯이 말이다.

쿠치넬리는 2016 가을·겨울 패션 카탈로그의 마지막 부분에 이렇게 썼다. ‘미시킨 공작(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백치’의 주인공)은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할 것’이라고 말했을 때 비웃음을 받는다. 하지만 당대 사람들에게 멸시 받았던 다른 많은 선지자들처럼 그는 옳았다.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할 것이다. 우리의 유일한 임무는 아름다움을 지키는 것이다. 용기와 사랑으로 자연을 보고 배우면서 단순하고 도덕적으로 살면 그렇게 할 수 있다.”

아름다움을 지키는 한 가지 좋은 방법이 떠올랐다. 쿠치넬리의 말뿐 아니라 그의 디자인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큰맘 먹고 쿠치넬리의 2016 봄·여름 컬렉션 중에서 바이커 스타일의 돌색 양가죽 조끼를 사 입는 건 어떨까?

- 니컬러스 포크스 NEWSWEEK 기자 / 번역 정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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