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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의금의 계절…봄이 또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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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 기자 중앙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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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현
JTBC 경제산업부 기자

벌써 입춘이 지나고 한 주 뒤면 눈이 녹아 비가 된다는 우수다. 곧 개나리 피고 벚꽃 날리고, 책상 위에 청첩장도 만발하는 계절이다. 지난해 12월, 전북 완주에서 직장 동료의 결혼식 뒤풀이에 참석해 842만원이 든 축의금 봉투를 훔친 40대가 경찰에 붙잡혀 불구속 입건됐다. 벌을 받아 마땅한 도둑질인데, 문득 ‘혹시 피의자가 40대에 미혼은 아닐까’ 궁금해졌다. 국민연금처럼 철마다 꼬박꼬박 냈으나, 언제 얼마를 돌려받을지 기약 없는 내 축의금 봉투들을 떠올리며.

 친한 친구들 결혼만 챙긴다면 별문제가 없다. 오래전 연락이 끊긴 친구, 회사 밖에선 만난 적 없는 어정쩡한 거리의 동료 기타 등등 ‘애매한 사이’에 건네는 청첩장이 고민거리다. 모임에 얼굴 한 번 안 비치더니 “지방 결혼식인데 꼭 와달라” 메시지를 보내는 친구나, 예전 출입처까지 손수 전화를 돌리는 기자나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걸까.

 내 축의금을 가져갔던 지인들에게 물어봤다. 부담스럽게 여기저기 청첩장을 보내는 이유가 뭐냐고. 반듯한 A는 결혼이 인생의 큰 경사이니 이참에 오래 못 본 이들과 연락하겠다는 마음이라고 설명해줬다. 세심한 B는 축의금 때문이 아니라 예식이 끝나고 기념사진을 찍을 때 뒤에 서 있는 친구가 별로 없으면 사회성이 떨어져 보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또 다른 이에겐 “조금만 신경 쓰면 예식 비용을 충당하고도 남는 장사가 될 수 있으니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노골적인 이야기도 들었다. 한 친구는 “애매한 문제이긴 하지만 결혼식을 계기로 인간관계가 정리됐다”며 청첩장을 받으면 저장해둔 엑셀 파일을 먼저 열어본다고 했다. 본인 결혼식 때 축의금을 냈는지, 얼마를 넣었는지에 따라 받은 만큼 준다는 것이다.

 “결혼식장에 한번 가려면 한숨을 몇 번은 내쉬어야 한다. 길을 메운 자동차들이 그렇고, 드디어 식장에 들어서면 발길을 가로막는 유명인사들의 화환과 그 이름에 놀란다.…돈 봉투를 들고 줄 서서 기다리는 동안 축복의 마음은 온데간데없어지고 만다.” 또래 친구들의 말이 아니다. 26년 전 어느 봄날에 본지 ‘분수대’에 실린 글이다. “돈 봉투나 화환을 받지 않아도 될 사람들이 먼저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처방까지 제시했다. 어느 선배가 썼는지 모르겠지만 이젠 아마 ‘결단을 내릴 수 있는’ 혼주 나이가 되셨을 터다. 그런데도 우리 결혼 문화는 조금도 바뀐 게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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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담스러운 청첩장’의 진실을 캐묻다 보니 기혼이나 미혼이나 공통된 생각이 하나 있었다. 당사자들이 작은 결혼식을 하고 싶어도 부모님이 수십 년 동안 낸 경조사비와 체면 때문에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나만 손해 볼 수는 없다는 마음으로 시작하는 결혼이라니, 뒷맛이 쓰다.

이 현 JTBC 경제산업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