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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勞使모델 혼선' 재계 곤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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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대체 정부의 진의가 뭐냐." "근로자의 경영참가를 보장한다면 기업 보고 다 죽으라는 얘기냐."

이정우 청와대 정책실장이 "우리가 본받아야 할 모델은 근로자와 끈질기게 대화.설득하면서 노사정 대타협을 이룬 네덜란드식 조합주의"라고 밝힌 중앙일보와의 좌담과 청와대 브리핑 내용이 알려진 2일, 재계는 이처럼 온통 들쑤신 듯한 분위기였다.

경총 김영배 전무는 "유럽식 노사문화로 간다면 노조들이 대부분 경영권 참여를 주장하게 될 것"이라면서 "또 다른 노사 갈등의 불씨가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삼성경제연구소 정문건 전무는 "유럽식 모델은 기업과 산업 활력을 떨어뜨린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라고 지적했다.

민주노총 손낙구 교육선전실장도 "네덜란드 제도를 본뜬 기존의 노사정위도 사용자가 노조를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에서 공전하고 있는데 무슨 네덜란드식이냐"며 부정적인 견해를 밝혔다.

◇ 노동정책은 어디로 가나=재계에선 무엇보다 정부가 지향하는 노사관계 모델이 뭔지 헷갈린다고 입을 모은다. 재계 관계자는 "노무현 대통령이 여러 기업인이 모인 자리에서 공개적으로 '유럽식 모델이 실패했고 영.미식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기에 그런 줄 알고 있었다"면서 "그런데 핵심 참모인 이정우 실장은 '유럽식이 본받아야 할 모델'이라고 하니 뭐가 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어느 쪽이 옳고 그름은 둘째 치고, 정부 안에서조차 이처럼 생각이 엇갈린다면 국민은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이라는 말이냐는 푸념이다. 특히 이것이 또 다른 노사분규의 불씨가 될 것이라는 우려가 많다. 개별 기업의 노사 협상 때 이 문제가 쟁점이 돼 불필요한 갈등을 낳을 수 있다는 것이다.

◇ 위법에 돈도 많이 들어=근로자의 경영 참가에 대해 재계는 현행 노동법에 위배된다고 주장한다. 김영배 전무는 "현행 법에 따르면 경영.인사권은 노동쟁의의 대상이 될 수 없다"면서 "노조의 경영권 참여는 불가능하다"고 밝혔다. 또 金전무는 "만약 정부가 관계 법령을 고치거나 행정절차를 개정해서라도 추진하겠다면 우리는 이를 막을 것"이라고 못박았다.

재계는 기업경영도 크게 위축될 것이라고 우려한다. 업계 관계자는 "현대자동차가 지난해부터 다임러 크라이슬러그룹과 함께 전주 상용차 공장 합작법인을 설립하려 하지만 잘 안되고 있다"면서 "노조가 경영권 참여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추가적인 비용부담도 우려되는 대목이다. 예컨대 근로자 재배치에 노조가 쉽게 동의하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근로자들을 새로 충원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이중적 경제정책으로 기업 골탕=李실장의 1일 발언은 정부가 기업정책은 영.미식, 노동정책은 유럽식으로 가겠다는 생각으로 보인다.

참여정부의 기업정책은 유럽식이 아닌 영.미식 신자유주의다. 유럽식 기업정책은 전통적으로 오너의 경영권을 확실히 보장해준다. 스웨덴 왈렌베리 가족은 세계적 통신회사인 에릭슨의 주식을 8%밖에 소유하지 않지만 의결권은 무려 85%나 된다.

정부가 오너 주식에 대해선 주당 1천표의 의결권을 주는 차등의결권제도를 채택하고 있어서다.

제도적으로 외국자본의 적대적 인수.합병(M&A)도 최대한 가로막고 있다. 네덜란드는 M&A 위협에 직면한 오너들이 우호세력을 지정해 주식을 발행할 수 있는 긴급우선주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소액주주의 권리를 보호하는 제도적 장치 마련에도 소극적이다. 집단소송제는 물론 집중투표제도 시행하지 않고 있다.

진보적 성향 학자들의 모임인 대안연대 정승일 박사는 "네덜란드 등은 이처럼 오너의 경영권을 철저히 보호해주는 대신 기업들에 경영의 투명성과 사회보장 책임을 지우고 있다"고 말한다. 예컨대 근로자의 경영 참가를 대체로 인정한다. 또 노조를 끈질기게 설득해 노사 간 대타협을 해야 하는 부담도 있다. 정리해고 등 노동의 유연성도 영.미식만큼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참여정부는 유럽처럼 경영권은 보장해주지 않으면서 유럽식의 노사관계를 강조한다. 기업정책은 영.미식이다. ▶적은 지분을 가진 오너가 경영권을 독점하고 있다고 비판하며▶외국자본이 국내 기업을 인수해도 전혀 문제될 게 없다고 생각하고▶그룹 구조조정본부의 해체 등을 강조하면서 그룹보다 독립경영방식을 더 선호하는 듯한 경향을 보이고 있어서다.

전경련 관계자는 "노동정책을 유럽식으로 하겠다면 기업정책도 유럽식으로 해야 한다"면서 "어떻게 정부가 필요한 것만, 골라서 할 수 있는가"라고 비판했다.

김영욱.정선구 기자

<사진설명>
재계의 '신 노사문화 확립을 위한 우리의 다짐' 결의문 선포식이 2일 서울 여의도 전경련회관에서 열렸다. 현명관 전경련 부회장(오른쪽에서 셋째)과 60여개 기업체의 대표들은 정부가 노조의 불법행위에 대해 엄정하게 법 집행을 해줄 것을 촉구했다.[최승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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