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발표작·기념첩 등 발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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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우리 연극사(演劇史)의 개척자인 노정(蘆汀) 김재철(金在喆, 1907~33) 의 삶과 사상을 살펴볼 수 있는 '노정 기념첩'과 미발표 원고가 발견됐다.

'노정 기념첩'은 27세에 요절한 김재철의 삶을 아쉬워하며 그의 지인들이 추모의 글과 사진을 40쪽 분량에 실어 1934년 비매품으로 펴낸 것이다. 김태준.이희승.조윤제 등 경성제대 동창들과 '조선어문학회'소속 학자들, 그리고 경성제대 스승인 다카하시 도루(高橋亨) 등이 편집에 참여했다. 미발표 원고는 김재철이 29년(경성제대 4학년)에 남긴 시(詩)가 주류를 이룬다.

김재철은 대학을 졸업한 후 당대의 역작으로 손꼽히는 '조선 연극사'를 펴냈고 또 '조선어문학회'를 창립하면서 당시 지성계의 중심에서 활약했다. 충북 괴산의 갑부집 아들로 태어난 그이기에 가능하기도 했겠지만, 34년 당시에 이같은 기념첩이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우선 흥미롭다.

이 자료를 소장하고 있는 심우성(69) 공주민속박물관장은 "이런 유의 기념첩을 따로 본 적이 없는 희귀한 사례 "라면서 "나 자신이 6.25 전쟁 때 시골의 골방에서 김재철의 '조선 연극사'를 처음 접한 이후 민속학을 연구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더욱 감회가 깊다"고 말했다.

'노정 기념첩'과 미발표 원고는 심관장의 주도로 최근 복간돼 나온 김재철의 '조선 연극사'(동문선 펴냄)의 부록에 실려 있기도 하다. '조선 연극사'는 33년 처음 출간된 바 있다.

심관장은 "김재철은 그 명성에 비해 알려진 것이 별로 없었다"면서 "이번에 공개하는 기념첩과 원고를 통해 일제 강점기를 산 한 천재적 지성이 민족과 사회와 예술의 현실과 미래를 어떻게 진단했는지 다시 조명해 보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밝혔다.

'노정 기념첩'을 보면 김재철은 당시 사회주의자였던 김태준과 경성제대 시절부터 둘도 없는 친구로 교류를 해왔다. 두 사람은 '조선어문학회' 창립을 주도했으며, 학회의 운영자금은 부자였던 김재철이 대부분 지출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함께 미발표 원고에는 당시 조선 사회를 바라보는 김재철의 비판적 시각이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서울 광진곡(狂進曲)''시골 광진곡'이란 시의 제목에서 부터 동시대를 보는 그의 관점이 드러난다. 민요조 가락의 이 시에서 김재철은 "카페에서 흘러오는 유행 창가는 열댓 살된 어린 학생 합창이란다.

망해 가는 서울이니 더 볼 것 있나"('서울 광진곡')라거나, 또 "조선 땅이 죄 없건만 원망을 하며 부모 이별 형제 떠나 처자 버리고, 유리(流離)하러 나선 사람 어데로 가나"('시골 광진곡') 라고 하는 등 당시 서울과 시골의 풍경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잡념일속'이란 글을 통해선 "빈약한 우리 출판계에 족보 발행수가 점점 늘어간다"면서 "대가족 제도에 우리들은 얼마나 파멸당해 왔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주목되는 것은 경성제대 시절에도 테니스 치기와 바이올린 연주를 좋아했다는 그가 인형극.가면극 등 '광대'들의 놀이에 관심을 가졌다는 점이다. 심우성 관장은 "민중 예술의 원형을 탐구하는 가운데 조선의 나아갈 길을 모색했던 김재철의 연극관은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다"고 말하고 "그의 '조선 연극사'를 높이 평가하면서도 해방 이후 계속된 이념 대결 속에 그의 업적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측면도 있다"고 말했다.

'노정 기념첩'과 미발표 원고를 '조선 연극사'와 비교해 가며 분석한 서연호 고려대 교수는 "'조선 연극사'는 출판 과정에 많은 부분이 삭제당했는데 대부분 프롤레타리아 연극 관련의 내용일 것"이라면서 "그가 남겼다고 하는 수편의 희곡 가운데서 단 한편도 찾아볼 수 없어 더욱 아쉽다"고 말했다.

배영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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