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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배명복 칼럼

외교 없는 북핵 외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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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배명복
배명복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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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예측대로라면 북한의 김씨 왕조 정권은 벌써 망했어야 한다. 15년 전인 지난 2000년, CIA는 당대 최고 전문가들과 15개월에 걸친 토의 끝에 ‘글로벌 트렌드 2015’란 미래 예측 보고서를 내놓았다. 이 보고서에서 CIA는 “2015년에는 통일된 남북한이 아시아 지역에서 상당한 군사력을 과시하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통일 과정에서 한국이 상당한 에너지와 자원을 소비하게 될 것이란 전망도 했다. CIA는 완전히 헛다리를 짚었다. ‘예측’이라기보다는 ‘기대’에 가까웠다.

 세계 최고의 정보력을 자랑한다는 CIA도 세계 최고의 ‘폐쇄국가’ 북한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CIA 한국지부장을 지내기도 했던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 미 대사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북한은 미 역사상 최악의 정보 실패 사례”라고 실토했다. 그는 지난해 출간한 회고록 『역사의 파편들(Pot Shards)』에서 정보 부재가 미국의 대북 정책에 미치는 폐해와 부작용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는 “미국은 잘 모르거나 싫어하는 외국 지도자나 단체를 ‘악마화(demonization)’하는 경향이 있고, 그때마다 미국은 문제에 봉착했다”며 “상대에 대한 무지의 간극을 편견으로 메우게 되면 선동이 분쟁을 촉발하고, 그 결과는 모두에게 손해”라고 강조했다.

 한·미의 대북 정보력은 이달 초 실시된 북한의 4차 핵실험으로 또다시 완전히 허를 찔렸다. 미국은 첩보위성으로 북한의 동태를 실시간 감시하고 있음에도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발(發) 인공지진파가 지진계에 잡힐 때까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미국은 미리 알고 대비하고 있었다는 보도가 있었지만 그건 사실과 다르다고 박근혜 대통령은 신년 기자회견에서 공개적으로 선을 그었다. 북한 실정과 동향에 관한 ‘까막눈’ 신세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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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 핵이란 악성종양을 조기에 발견하고도 말기암 상태로 진행되는 걸 막지 못한 데는 북한에 대한 정보 부재가 한몫을 했다. 한·미 양국은 확실한 근거도 없이 ‘북한 붕괴론’이란 ‘희망적 사고(wishful thinking)’에 매달렸다. 1994년 핵을 동결하는 대가로 북한에 경수로 2기(基)를 건설해 주기로 한 ‘북·미 제네바 기본합의’ 당시 미 협상팀이 ‘10년 내 북한 붕괴론’에 심취해 있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명박 정부 시절 국정원에는 ‘2015년 북한 급변사태론’이 정설처럼 퍼져 있었다. 3대 세습에 따른 체제의 불안정성 탓에 김정은 정권이 몇 년 못 버틸 것이란 ‘자기충족적 예언’이었다.

 북한 핵 문제가 손 쓸 수 없는 단계로 악화되는 걸 뻔히 보면서도 한·미는 북한 체제가 오래 못 갈 것이란 막연한 기대에 빠져 사실상 손을 놓고 있었다. ‘통일대박론’과 함께 “북핵 문제의 근본적 해법은 통일”이라는 말이 대통령 입에서 스스럼 없이 나올 수 있었던 것도 그런 기대 때문이었다. 하지만 희망 섞인 기대와 달리 집권 5년차를 맞은 김정은 정권은 빠르게 정치·경제적 안정을 찾아가는 모양새다.

 지난주 외교안보 분야 국정보고에서 박 대통령은 5자회담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6자회담이 무용지물이 됐으니 북한을 뺀 나머지 5개국이 모여 대북 압박의 고삐를 죄어 보라는 주문이다. 박 대통령이 북한 붕괴론의 끈을 여전히 놓지 않고 있다는 방증이다. 중국만 협조하면 북한 체제를 무너뜨릴 수도 있는데, 중국이 안 도와줘 유감이란 아쉬움도 읽힌다. 중국에 그럴 의지가 있었다면 북핵 문제는 이 지경까지 오지도 않았다. 안타깝지만 그게 현실이다.

 북한의 4차 핵실험 이후 윤병세 외교팀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지만 실속은 없다. ‘상응하는 대가’ ‘전례 없이 가혹한 제재’ 등 구호만 요란할 뿐 손에 잡히는 게 없다. 초강력 제재로 김정은 정권의 목에 칼을 들이대겠다는 패기는 좋지만 중국이 도와주지 않는 한 허공에 대고 주먹질하는 격이다. 뭔가 하는 듯한 모양새만 있지 알맹이가 없는 게 윤병세팀의 북핵 외교다.

 이제부터라도 외교다운 진짜 외교를 해야 한다. 그것은 북한 붕괴론의 환상에서 깨어나 북한의 구미를 당길 만한 카드를 갖고 평양과 워싱턴이 대타협을 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유엔 안보리를 통한 대북 제재는 제재대로 추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중재안을 만들어 북·미 사이에서 노련한 중재자 역할을 해야 한다.

 정전체제의 평화체제 전환과 북·미 관계 정상화를 북한의 핵 포기와 맞바꾸는 ‘그랜드 바겐’을 추구하되 일단 북한이 핵 활동을 동결하고 협상을 하는 동안에는 한·미 연합훈련을 중단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다. 안 가본 길이기 때문에 물론 두려울 수 있다. 그러나 지금 필요한 것은 시늉만 하는 가짜 외교가 아니라 담대하고 창조적인 진짜 외교다.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