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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 혁신은 모두를 위한 과학기술 기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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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3호 10면

세계 인구의 절반인 약 30억 명은 아직도 동물 배설물이나 나무, 석탄 등 고체연료를 사용한다. 개발도상국 여성은 가족을 위해 열악한 환경에서 이 연료를 이용해 요리도 하고 난방도 한다. 이들은 매일 연료가 되는 것을 구하기 위해 다녀야 한다. 연료를 구하고 활용하는 데 그들만의 노하우가 생기게 마련이다. 이들은 기술의 소비자인 동시에 생활밀착형 기술 전문가인 셈이다.


 2014년 세계보건기구에 의하면 고체연료로 인한 오염으로 매년 400만 명 가까운 사람이 죽어간다. 개발도상국에 태양열을 이용한 가정용 스토브만 제대로 보급돼도 대기오염과 탄소 배출량을 줄일 수 있다고 한다. 태양열 스토브는 첨단 기술이 아니라 개발도상국에서도 얼마든지 생산할 수 있는 적정 기술에 속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에너지의 주 사용자이자 공급책인 개도국 여성의 관점이 제품 디자인, 생산, 유통, 사후관리 등 전 단계에 반영된다면 태양열 스토브 기술은 ‘모두를 위한 과학기술’로 개도국 여성의 삶은 물론 기후변화에도 좋은 영향을 줄 것이다.


 지난해 9월 유엔은 앞으로 15년 후인 2030년을 향한 17개의 지구촌 과제를 정리한 지속가능발전목표(SDGs·Sustainable Development Goals)를 발표했다. 이런 SDGs를 젠더 관점에서 지원하기 위해 지난해 10월 독일 본에서 유엔 산하 여성기관이 모여 전문가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는 남녀 모두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기술의 최종 사용자임에도 관련 정책 수립에 젠더 관점이 반영되지 않았다는 반성이 있었다. 또 과학기술은 젠더 중립적이라는 편견 때문에 기술개발에도 젠더 관점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지적이 많았다. 특히 개발도상국에서 여성은 기술의 소비자인 동시에 물과 농업 등 생활밀착형 기술 전문가라는 점에서 기술개발 전 과정에 여성의 참여는 필수다.


 세계은행은 2008년 과학기술 전 분야에서 젠더 혁신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성평등으론 충분하지 않다. 과학기술 역량을 키우는 데 있어 모든 단계에 젠더 관점을 주류로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미 신약 개발부터 자동차 생산, IT서비스에 이르기까지 남녀의 차이와 젠더 특성을 반영한 연구개발이 필요하다는 과학적 증거가 제시되고 있다.


 가령 여성 질환을 치료하는 데 쓰일 동물실험에 수컷 쥐를 사용한다든가, 여성 운전자를 고려하지 않은 자동차 충돌실험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연구결과가 무수히 나와 있다. 과학기술 연구에 젠더 혁신을 추가한다면 새로운 시장을 창출할 수 있으면서, 또 유엔이 주창하는 개발도상국 문제 해결을 위한 ‘모두를 위한 과학기술’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여성은 지구 환경에 부정적 영향을 주는 위험 기술을 거부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이 점을 고려해 정책을 수립하고 연구개발을 한다면 기후변화 대응에 효과적으로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해 8월 한국은 아태지역 최초로 ‘젠더서밋’을 개최하며 과학기술계에 젠더 기반 혁신 이슈를 처음으로 공론화했다. 이 젠더서밋의 후속 작업으로 ‘유엔 지속가능 발전 목표 달성을 위한 젠더 기반 혁신의 역할’이란 보고서를 발간했다. 이 보고서는 과학기술 젠더 기반 혁신이 기후변화 대응, 기아 해소, 젠더 평등, 보건 증진 등을 포함하는 유엔 지속가능 발전 목표 달성에 필수불가결한 요소임을 밝히고 있다.


 우리나라는 부끄럽게도 OECD 국가 중에서 과학기술 분야 젠더 격차가 가장 큰 나라로 분류된다. 하지만 뒤늦게 각성한 여성과학기술계를 중심으로 젠더 이슈를 잘 활용하면 유엔이 야심차게 시작한 지속가능한 발전 목표 달성에 어느 나라보다 훌륭하게 기여할 수 있는 플랫폼과 환경이 조성돼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해 9월 유엔개발정상회의 기조연설에서 ‘소녀들의 보다 나은 삶(The Better Life for Girls)을 위한 이니셔티브를 통해 개발도상국 소녀를 지원하기로 약속했다. 소녀를 위하는 길이 미래를 위한 가장 확실한 투자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젠더 평등을 증진하는 동시에 젠더 기반 혁신을 통해 포괄적으로 유엔의 지속가능 발전 목표 달성에 기여할 수 있는 하나의 방안이 될 것이다.


이혜숙 소장한국여성과학기술인지원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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