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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임 대통령·소선거구 … 유효기간 지난 시스템 깨뜨려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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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원희룡 제주지사, 남경필 경기지사, 안희정 충남지사, 김부겸 전 의원.

일요일인 지난 17일 제주엔 많은 비가 내렸다. 오후 제주도립미술관 카페테리아엔 원희룡(52·새누리당) 제주지사, 남경필(51·새누리당) 경기지사, 안희정(51·더불어민주당) 충남지사와 김부겸(58·더불어민주당) 전 의원이 모였다.

월간중앙 초청, 4인 가슴 튼 토론

‘한국의 위기, 정치 회복으로 풀자’는 주제로 토론을 벌이기 위해서다. 사회는 중앙일보 전영기 논설위원이 봤다.

이들은 50대 차세대 리더로 불린다. 여야 관계를 넘어 친분을 맺어 왔다. 극단 배제, 온건 실용의 정치를 추구해 온 공통점이 있다.

4인은 월간중앙이 초청하고 원희룡 지사가 토론 장소를 제공하면서 모처럼 만나게 됐다. 편안하고 고즈넉한 공간 덕인지 도지사들은 평소 자제하던 정치 얘기를 술술 풀어냈다.

4시간의 토론을 마친 뒤 흑돼지 집에서 소주를 곁들인 저녁 식사가 2시간가량 이어졌다. 술을 끊은 원 지사는 한 방울도 마시지 않으면서도 분위기를 주도했다. 나머지 세 명은 이튿날 근무를 위해 밤 비행기를 타야 했다.

4인 토론의 결론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었다. “정치, 그 자체가 한국의 위기다. 문제를 만드는 정치가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는 정치가 오늘의 시대정신이다.”

다음은 주요 토론 내용.

◆위기의 한국 정치

 ▶전영기 논설위원(사회)=한국 사회가 위기인데 정치는 무엇을 하는가, 비판의 목소리가 크다. 역설적으로 ‘정치에 답이 있다’라는 이야기도 있다. 네 분에게 각각 묻겠다. 정치는 무엇인가.

 ▶원희룡 제주지사=정치는 다수의 합의를 이끌어내는 과정이다. 통합된 사회를 만드는 게 목표다. 권력 추구의 과정이면서 동시에 많은 사람의 동의를 얻어나가는 확대와 포용의 과정이라 본다.

정치는 공존의 논리에 기반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한국에서 정치는 위기 그 자체다.

 ▶남경필 경기지사=신은 완전하지만 인간은 완전하지 못하다. 인간은 원래 틀릴 가능성이 굉장히 많은 존재다. 거기서 정치가 시작한다. 진짜 대화를 해야 정치다.

경청하는 것만으론 부족하다. 상대방을 적당히 이해하는 게 아니라 핵심을 이해해야 한다. 내가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체화(體化)해서 진정한 겸손함에 도달하는 게 정치의 길이라고 본다.

 ▶안희정 충남지사=젊었을 때는 불의와 싸워 정의가 이기는 역사를 만드는 것이 정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요즈음 옳고 그름의 경계가 옛날처럼 분명하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사회는 엄청나게 많은 이해관계가 뒤엉켜 공존한다. 이것을 조절해 평화와 통합으로 이끄는 작업이 바로 정치라는 점을 인식하게 된다.

 ▶김부겸 전 의원=결국 정치는 책임감이다. 문제 제기하는 집단을 떠나 문제를 해결하는 위치에 오른 사람들이 정치인이다. 정치는 책임감을 통해 의지를 구현하고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다.

정당이나 자신이 속한 정파에 대한 충성보다 국민에게 책임지는 것이 정치라고 본다. 정당은 유한하지만 국가공동체는 무한하다.

 ▶사회=한국 정치의 폐해를 궁중형, 운동권형으로 분류해 봤다. 궁중형은 소통의 부재, 군림하려는 자세이고 운동권형은 독선과 진영 논리, 투쟁 일변도의 태도다.

한국의 의사결정 구조를 왜곡하는 두 가지 정치 행태다. 양쪽에서 모두 허물을 벗고 새로운 정치문화가 나와야 하는데 그 힘은 어디에서 나올 것으로 보나.

 ▶남=적대정치의 본질은 소선거구제, 양당제, 5년 단임제에서 나온다. 이것들은 1987년 체제의 산물이다. 87년 체제는 유효기간이 다했다. 낡은 정치 체제가 엄존하는데 정치인에게만 올바른 행동을 주문하는 건 무리다. 늘 똑같은 비판만 나올 뿐이다.

이번 선거에서 각 정파는 정치의 구조를 바꾸는 공약을 국민에게 내놓아야 한다. 선거구제, 연정(聯政·연합정부), 개헌 등 정치의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공약을 내놓고 국민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

 ▶안=새로운 정치로 가기 위해서는 절대선과 절대정의의 기준을 고집해선 안 된다. 정의와 불의, 선과 악, 적과 동지라는 프리즘을 가지고 상대를 고립시키거나 몰아붙이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이런 파시즘적 태도는 민주주의 본래의 철학 사상과는 인연이 전혀 없다.

신자유주의자 아니냐, 친미주의자 아니냐, 계급주의자 아니냐, 이렇게 싸워서는 어떤 생산적 논의도 불가능하다. 그런 과거와 결별하자는 것을 제안한다.

 ▶김=편 가르기, 진영 가르기가 문제다. 진영 내에서 열렬한 지지를 받는 것을 마치 정치의 본령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언론도 자극적인 기사 제목에 집착해 양쪽에 싸움을 부추기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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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위기, 정치 회복으로 풀자’를 주제로 한 토론회가 끝난 뒤 전영기 중앙일보 논설위원, 남경필 경기지사, 김부겸 전 의원, 안희정 충남지사, 원희룡 제주지사(왼쪽부터)가 모임을 하고 있다. [사진 임현동 기자]

지금 공동체가 공멸의 위기다. 정치가 제구실을 못해 국민 전체가 절망적인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다. 뭔가 문제를 풀려고 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제대로 알려져야 한다.

 ▶남=지도자의 리더십이나 태도는 제도의 산물이라고 생각한다. 2000년대 초반 독일 슈뢰더 총리가 좌파 지지 기반의 반발을 무릅쓰고 우파적 개혁을 했다. 노동시장 유연화, 실업급여 축소, 연금 수령 나이 연장 등 소위 ‘하르츠 개혁’을 하는 바람에 선거에 졌다.

선거에 졌지만 선거에 승리한 메르켈 총리의 대연정에 참여해 하르츠 개혁은 계속됐다. 그게 우리나라 같으면 가능했을까. 정권 뺏기는 것을 목숨을 잃는 것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나라다.

 그런데 우리가 뽑은 대통령들이 늘 독일 정치인보다 못한가? 그렇지 않다. 결국 제도가 정치인을 그렇게 행동하도록 규정지어 왔다는 것이다. 승자 독식이기 때문에, 1% 지면 끝장이기 때문에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싸운다.

이번 총선에서 선거구제 개편, 권력구조 개편의 담론이 나와야 한다. 친박과 비박의 공천 싸움, 친노와 비노의 공천 싸움, 문재인과 안철수의 야권 권력 싸움, 권력을 놓고 서로 누가 많이 먹느냐, 공천은 어떻게 할 거냐, 이 싸움 외에 이번 선거에서 눈에 띄는 시대논쟁이 없다.

안철수 현상 등 야권의 분열도 결국 진영정치를 그만하라는 국민들의 경고장이다.

 ▶사회=운동권 출신으로서 강력한 투쟁도 해보셨던 원희룡 지사는 민주주의를 가로막는 두 가지 폐해(궁중형 정치, 운동권 정치)를 어떻게 극복해야 한다고 보나.

 ▶원=운동권 민주주의의 폐해는 흑백논리다. 처음 의식화될 때 역사적 의식이었던 것이 굳어져 버리면 하나의 세계관이 된다. 나와 다르면 결국은 없어져야 될 파괴의 대상이 된다. 밉지만 그래도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익혀나가는 게 민주주의다.

궁중형 민주주의는 주로 새누리당이 문제가 된다. 집권하는 과정에서는 복지, 경제민주화 등 중도 전략을 쓰지만 집권 후에는 당장 발생하는 현안 과제에 매몰된다.

대통령에게 정당과 국회는 토론과 합의의 창구가 아니라 동원 대상이 되는 경향이 있다. 이 두 가지 극단적 정치 행태를 극복하는 길은 다당제를 도입하는 것이다.
 
◆연정은 진영 갈등을 극복할 수 있나

 ▶사회=정치 시스템의 핵심은 최종 의사결정을 누가, 어떻게 하느냐의 문제다. 다수결도 아니고 합의제도 아닌 우리의 국회선진화법이 국회를 후진시키고 있다.

독일식 연정이 지속적으로 우리의 관심을 끄는 이유는 그들의 의사결정이 효율적으로 합의에 이르는 방식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독일은 연정으로 국가적 위기를 돌파해 왔다. 우리 정치에서 연정의 조건과 가능성을 어떻게 봐야 할까.

 ▶안=제도로서의 연정도 중요하지만 대통령이나 도지사가 연정에 필적하는 리더십의 유연성을 갖추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중앙정부의 연정까지 이야기하기는 조금 버겁지만, 우선 연정에 준하는 기본 정신에 따라 대통령이 의회와 협력하겠다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본다.

 ▶남=연정이라는 게 사실 양당제와는 맞지 않는다. 양당제는 고속 성장의 시기와 궁합이 맞는 정당 체제다. 성장이 일상적으로 둔화되는 뉴 노멀의 시대에는 양당제보다 다당제가 답이다.

 ▶사회=1년 반 가까이 연정을 실험해 본 결과, 여소야대 경기도의회에 기대하던 효과가 나타났나.

 ▶남=연정은 개인 간 사랑의 행위가 아니다. 대단히 정치적이고 계약적인 과정이다. 우리(경기도의 여와 야)는 20개 항의 계약서를 쓰고 연정을 시작했다. 계약서대로 아주 잘됐는데, 최근 계약서에 없었던 무상보육 문제가 돌출했다.

독일의 연정을 보면 계약서를 정말 꼼꼼하게 쓴다. 앞으로 벌어질 수 있는 여러 가지 정치 상황이나 사회적 의제에 대해 좀 더 촘촘한 계약서를 쓰는 게 필요하겠다고 생각했다.

 ▶사회=남 지사는 도의회에서 과연 다수당이 됐어도 연정을 제안했을까.

 ▶남=아데나워 총리가 독일 역사상 처음으로 52%를 득표해 단독 과반에 성공했다. 그래서 많은 지지자가 “연정을 할 필요가 없다”고 했지만 아데나워는 달랐다.

“한 정권 안에서 반대자가 없는 것은 너무나 위험하다”는 것이 그 논리였다. 진영을 뛰어넘는 진정한 통합 정신, 연정 정신이다.

 ▶원=연정을 하려면 소연정이 아니라 제1당, 제2당이 연합하는 대연정을 해야 한다. 양 극단의 정치 세력들을 변방으로 몰아내야 한다.

대연정을 통해 통일 정책, 사회적 대타협, 정치인 충원 구조 같은 주요 이슈에서 큰 틀의 정치적 합의를 이뤄야 한다.

 ▶사회=4·13 총선의 이슈는 다시 등장한 안철수 현상, 문재인 대표의 친노 패권주의 문제, 유승민의 보수 개혁 등이다. 총선 관전법과 시대정신에 대해 얘기해 달라.

 ▶김=성실히 열심히 살았음에도 부모 봉양이 쉽지 않고, 자녀들은 청년 백수로 고통받고 있는 시대다. 그 분노와 허탈감을 정치가 해결해야 한다.

 ▶원=이번 총선에서는 야당의 의석이 지금보다 좀 줄어들고 고전할 거라고 본다. 그동안 국민들이 야당을 향해 변화를 주문했지만 이를 거부하다 강제로 재편당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새누리당은 역대 선거에서 중간층을 공략하는 전략으로 성공했지만 이제는 안철수 신당에 중간층의 표가 몰릴 가능성이 있다. 당장 총선에서는 새누리당에 유리하게 작용하겠지만 다음 대선과 전체 정치 지형은 어려워질 가능성이 커졌다.

 ▶남=새누리당엔 공천룰 이슈, 유승민과 진박의 싸움이 있을 뿐 보수의 혁신 같은 담론이 떠오르지 않고 있다. 더민주는 김종인 선대위원장의 양손에 칼이 쥐여졌다. 공천권과 룰 세팅을 김 위원장 단독으로 좌지우지한다.

그가 묵은 상처 부위를 과감히 도려내는 데 성공하면 재미있는 국면이 올 것이다. 김종인식 정당 개혁의 성패는 이번 총선의 최대 관전 포인트 중 하나다.

 ▶안=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인데, 그 공간 내에서 정당이 주권자로부터 어떤 위임을 받느냐가 중요하다.

그런데 그 내용이 빈곤하다. 지역적 위임과 색깔론, 경제성장론, 복지 이런 것밖에 없다. 이것을 대체할 만한 선거의 새로운 이슈를 아무도 제기하지 못하고 있다. 그게 가장 안타깝다.

 ▶사회=과거 비주류 진영에 있던 여러분이 이제 차세대 정치의 주류로 진입하고 있는 것 같다. 정치문화의 교체, 시대의 변화를 이끌어주시기 바란다. 

사회 = 전영기 중앙일보 논설위원
정리 = 한기홍 기자 glutton4@joongang.co.kr
사진 = 임현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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