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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정 "세상의 편견, 몽땅 부서버리고 싶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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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들은 귀여운 마녀같대요. 아줌마들은 속 시원하다고 하고, 아저씨들은 털털하다고 반기고… 남녀노소 다 좋대, 국민배우야 이런 제기랄, 크하하하."

지난해 대한민국 시청자들은 황석정(45)이라는 인간이 내뿜는 요상한 기운에 홀렸다. 국적불명의 의상·헤어로 무장하고 "모스트스럽게!"를 외치는 패션지 편집장은 파격의 상징이었다.(드라마 '그녀는 예뻤다')

리얼리티 프로그램에선 정 반대였다. 쭈그려 머리 감기, 눈곱 낀 푸석한 '생얼' 등 여배우, 아니 일반인이라도 드러내기 꺼릴만한 일상을 처절하게 방출했다. (예능 '나 혼자 산다')

중간은 없이 늘 극과 극이었다. "설마?"라며 사람들이 그어놓은 경계선을 훌쩍 넘고선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깔깔댔다. 딱히 예쁘지도 않고, 한편으론 비호감 캐릭터에, 도무지 종 잡을 수 없는 그에게 시청자는 왜 열광할까. 20여년 무명생활을 딛고 40대 중반에 늦깎이 스타로 급부상한 배우 황석정을 만났다. 인터뷰 역시 TV 모습 그대로 거침없었다.

인기를 실감하나.
"솔직히 내가 나간 방송, 일일이 챙겨보지 않는 편이다. 그런데 밥 먹으러 식당 가면 사진 찍고, 껴 안고 난리다. 자기 멋대로 사는 게 신기해서 그런지, 아니면 연예인인데 자기보다 더 궁상맞은 게 만만해서 그런지 모르지만, 여튼 어리둥절하고 감사하다."
드라마 '미생'에선 짧지만 강렬했다.
"여태 사기꾼·고정간첩 등 거친 인생을 주로 연기했다. 한때는 탈북자 전문 배우였다. 내 연기철학은 100% 나쁜 사람은 없다는 거다. 사기꾼이지만 따뜻한 면이 있고, 아무리 착한 사람도 이면엔 비열한 구석이 있다고 생각한다. '미생'에선 아찔한 뒤태의 여성으로 우선 등장했다. 얼마나 상상력을 자극하겠나. 막상 앞을 보곤 충격적 얼굴에 경악하는데, 그게 안방까지 그대로 전달됐다. 뒤태 찍을 땐 대역을 썼다. 내 실제 모습? 벗겨보면 깜짝 놀란다, 크하하하."
대중적으로 각인된 건 '나 혼자 산다'였다.
"예능에 출연하면서 다짐했다. 거짓말하지 말자고. 곧 들통나니깐. 포장하는 성격도 안 된다. 한편으론 반감도 있었다. 여자는 깨끗해야 하고, 나이 들면 점잖아야 하고, 남자는 어쩌야 하고 등등. 이런 고정관념 정말 웃긴다. 여자라고 크게 웃으면 잘못인가. 여자도 포르도 본다. 욕망 있다. 또 나이 들어도 성질 난다. 다들 아닌 척 할 뿐이다. 절제하고 참는 건 미덕이지만, 불공평하고 비틀린 관습에 마냥 따르고 싶진 않다. 세상의 엉터리 편견, 다 부수고 싶다."
맡는 역마다 너무 센 편 아닌가.
"평범하게 하려해도 강하게 보인다. 반대로 그런 역할만 배정되곤 했다. 사실 지금껏 여배우로서 좋은 대우를 받진 못했다. '그렇게 생겨서 힘들겠다'는 말도 숱하게 들었다. 여배우는 무조건 예뻐야 한다. 아니면 아예 아주머니거나. 난 선택 폭이 별로 없었다. 그러니 어쩌다 배역이 오면 무조건 해내야 했고, 그런 절실함이 너무 강렬하게 분출됐을지 모르겠다."

그는 서울대 국악과(피리 전공)을 나왔다. 동기생 24명중 22명이 국립국악고 출신인데, 그는 특이하게도 인문계(부산여고) 출신이다.

중학교땐 필드 하키를 했다. 고등학교 들어가서 명창 김월하 선생 공연을 보러갔다. 옆자리에 앉은 이들은 꾸벅꾸벅 조는 데 난 가슴이 콩닥거렸다. 다음날 바로 국악학원에 찾아갔다."

어떻게 연기의 길로 들어섰나.
대학때 연극반에 있었다. 사실 혼자서 악기 연주할 때가 난 가장 행복하다. 반면 사람들과 뒤섞여 연극 하는 건 버거웠다. 내가 얼마나 모가 나 있고, 독선적인지 다 까발려진다고 해야 할까. 근데 중독성이 있었다. 힘들지만 좋았다.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에 대학로 극단(한양 레퍼토리)에 찾아갔다. 수제비 끓이고 포스터 하루에 1000장씩 붙였다. 기초가 부족한 탓인지 어떤 한계를 절감했다. 그러다 1995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에 다시 들어갔다."
타고난 연기자같다.
오해다. 주변에선 연기가 자연스럽다고들 하는데, 그렇게 보이려고 무진장 노력하는 거다. 알다시피 난 집안환경이 넉넉하지 않다. '세상엔 돈 밖에 없다' '남자는 다 늑대다' 등 부정적인 사고로만 가득했다. 어릴때부터 사랑받으며 커 오지 못했다. 근데 무대에서 사랑을 표현하라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남들은 아무렇지 않게 하는 연기의 ABC를 하느라 거의 죽다 살아났다."
무명생활이 20여년으로 꽤 길었다.
"작년에야 처음 밥벌이했다. 연극 하는 게 때론 백수보다 못하다. 일은 죽어라 하는데 벌이는 시원치 않고, 나이는 마흔이 훌쩍 넘었는데 앞가림도 제대로 못하고. 가족에게 미안하고. 때론 비참하고 가끔씩 슬펐다."
어떻게 버텼나.
"나보다 못난 인간들이 연기 잘 한다고 상 척척 받고, 돈 실컷 벌고, 좋은 데 시집가고 그러면 어찌 자괴감이 안 들겠나. 어설픈 위안을 하고 싶진 않다. 다만 하나는 깨달았다. 그렇게 잘나 보이는 인간들도 다들 태산같은 고민을 안고 살아가고 있더라. 우린 그걸 모르고, 알고 싶어하지도 않고, 그저 겉모습만 본 채 자신을 깎아내리며 절망하거나 분노하곤 한다. 반대로 본인이 진짜 무엇을 원하는지는 오히려 잘 모르는 것 같다. 나 역시 내 안의 있는 것을 보려고, 나란 인간이 어떤지 알려고 집중해왔다."
연극 '날 보러와요'(22일부터 명동예술극장)에 출연한다.
"작년에도 연극은 쉬지 않았다. '날 보러와요'는 영화 '살인의 추억'의 원작이다. 연출 김광림, 배우 김뢰하·권해효·유연수·류태호 등 20년전 초연 멤버가 다시 뭉쳤다. 오랜만에 다시 봤는데, 머리 희끗희끗해도 그 형들 하는 짓은 옛날이랑 똑같다. 어찌나 열심히들 하는지… 짠하고 정겹다."

최민우 기자 minwoo@joongang.co.kr

◇내가 본 황석정

연출가 김광림='날 보러와요'에서 황석정이 연기하는 남씨부인역은 극중 5분가량 한 번만 나온다. 사전 설명 없이, 5분 만에 인물의 본질을 드러내고 승부해야 한다. 자연히 다들 꺼리는 역이다. 그걸 황석정은 척척 해낸다. 순발력이 있으며 에너지가 강하다.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배우다.

배우 권해효=황석정을 처음 본 게 벌써 24년전이다. 그때도 충격적이었다. 국악을 했기 때문일까, 어떤 신명 같은 기운으로 우리 선배들을 압도했다. 한마디로 무당같았다. 노래도 춤도 걸쭉하고 찰지다. 술도 빼놓을 수 없고. 근데 피리 부는 건 한 번도 본적이 없다.(웃음)

평론가 정덕현=소화하기 힘든 과한 배역을 좌고우면하지 않고 그대로 직진한다. 내공이 있기에 가능하다. 황석정이 연기한 배역을 다른 누가 할 수 있을까 잘 연상이 안 된다. 그만큼 독특한 아우라로 여배우의 지평을 넓히고 있다.

◇연기자를 꿈꾸는 이들에게 하는 조언

1. 내 몸을 알자=연주는 악기가 매개지만 연기는 몸이 매개다. 몸과 그 안에 깃든 정신이 재료다. 자연스런 표정은 무엇이고, 어떤 동작을 편하게 하며, 무엇을 어색해하는지 또한 목소리톤은 어떤지 등을 잘 알고 있어야 한다.

2. 관찰하라=자신을 잘 알려면 툭 떨어져 놓고선 알기 어렵다. 타인과의 비교 검토를 통해야만 상대적으로 다른 본인의 특성을 찾아내게 된다. 사람은 누구나 묘한 버릇이 있고, 그게 성격을 암암리에 드러내곤 한다.

3. 때론 숨겨라=사전 설명이 없는 무대 연기는 친절하게 설명하는 게 필요하다. 하지만 드라마·영화는 이미 미장센·음악 등으로 주변 상황을 충분히 알려준다. 굳이 감정을 드러내는 게 독이 될 수도 있다. 얼핏 스치는 입가의 표정, 눈빛 만으로 더 강한 여운을 줄 수 있다.

4. 협업하라=모노드라마가 아닌 이상, 연기를 혼자 할 순 없다. 상대방의 기운을 받아 그걸 온전히 살려내면서 자신을 드러내야 한다. 배우뿐 아니라 스태프와의 협력도 필수다. 좋은 연기자는 곧 협력할 줄 아는 인간이다.

5. 기다려라=막상 촬영하는 시간을 짧다. 대부분은 기다리는 시간이다. 연극도 마찬가지다. 오래 묵혀야 배우간 에너지가 농축되고 폭발한다. 기다림의 과정은 한편으론 지루하고, 때론 쓸 데 없어 보인다. 그게 시간낭비로만 다가온다면, 연기 안 하는 게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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