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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홍준 “참 결이 고운 분 … 진주 같은 성찰 남겨”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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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2호 2 면

성공회대 성미가엘성당의 빈소에 놓인 고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의 영정. [뉴시스]

“없는 사람이 살기는 겨울보다 여름이 낫다고 하지만, 교도소의 우리들은 없이 살기는 더합니다만 차라리 겨울을 택합니다. 왜냐하면 여름 징역의 열 가지 스무 가지 장점을 일시에 무색케 해버리는 결정적인 사실―여름 징역은 자기의 바로 옆사람을 증오하게 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1988년 출간된 첫 저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중에서)


20년 동안 감옥에서의 엄혹했던 생활을 오히려 따뜻한 성찰의 메시지로 전환시킨 것은 ‘사색의 힘’이었다. 사색의 힘은 생각하는 습관에서 나온다. 75년의 ‘쉽지 않은 세월’을 뒤로하고 15일 타계한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 사색과 성찰이라는 표현이 그처럼 잘 어울리는 이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내가 (교도소에서) 자살하지 않은 이유는 ‘햇볕’ 때문이었습니다. 길어야 두 시간이었고 가장 클 때가 신문지 크기였습니다. 신문지만 한 햇볕을 무릎 위에 받고 있을 때의 따스함은 살아있음의 어떤 절정이었습니다.”(2015년 출간된 마지막 저서 『담론』 중에서)


겨울 감옥의 독방에서 비스듬히 벽을 타고 내려와 마룻바닥에서 최대의 크기가 되었다가 맞은편 벽을 타고 창밖으로 나가는 햇볕을 묵묵히 바라보는 신영복. 그에게 감옥은 ‘학교’ 그 이상이었다. 신문지 크기의 햇볕만으로도 세상에 태어난 것은 손해가 아니라는 생각을 그는 감옥의 고통 속에서 하고 있는 것이다.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받지 못했을 선물이라는 얘기다. 겪어 보지 않으면 모를 생각들, 비슷한 경험을 했더라도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그냥 지나쳐 버릴 사건들을 그는 놓치지 않았다. 감옥은 그에게 배움의 공간이면서 깨달음의 계기를 제공했다. 감옥생활을 오래 한 이들도 적지 않을 터이지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닐 것이다. 깊은 산속 사찰에서 동안거를 하며 구도 참선을 하는 선승의 모습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고인을 만났던 이들은 그의 고운 외모와 심성을 이야기한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민감한 이슈인 이데올로기 문제의 한복판에서 일생을 보냈지만, 거친 이데올로기의 시대와 잘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50대 이후의 수도자 같은 모습과 달리 그의 20대 초·중반은 격정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4·19혁명이 나기 한 해 전인 59년 서울대 경제학과에 입학해 학생운동에 입문했고 4·19혁명에도 적극 참여했다고 한다. 3학년 때부터는 학생운동권의 후배들을 지도하며 마르크스 계열의 좌파 성향 책들도 본격적으로 읽어나갔다고 한다.


그러다 68년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돼 구속된 것이 27세 때다. 대학과 대학원을 마치고 숙명여대와 육군사관학교에서 경제학 강사를 하고 있을 때였다. 무기징역 선고를 받고 47세가 되던 해인 88년 광복절 특사로 그는 감옥 문을 나섰다. 87년 민주화 이후 우리 사회의 변화를 그는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그해 나온 책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다. 한 달에 한 번 허용된 편지 쓸 자유의 시간을 활용해 좁은 엽서에 빼곡히 적어 보낸 글들이 그의 출옥에 맞춰 책으로 나왔다. 고인이 대중적으로 알려진 책이기도 하다. 감옥에서 그런 글을 썼다는 것도 놀랍지만 무엇보다 자신이 겪은 아픈 체험을 오히려 타인의 고통을 다독이는 위로의 말로 변환시키는 사고력에 적지 않은 이들이 공감했다. 그것은 이데올로기 문제와는 다른 차원의 공감이었다.


진보 진영에선 그가 과도한 형벌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보수 진영에선 그의 이념 성향을 여전히 의심하는 이들도 있다. 건국-산업화-민주화로 이어지는 파란만장한 대한민국 현대사의 한 축을 대변해 온 그가 살아있는 우리에게 남긴 것은 무엇일까.


16일 오후 2시 고인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 구로구 오류동 성공회대 성미가엘성당. 주로 야당 정치인들의 발걸음이 이어졌다. 각기 고인과의 각별한 인연을 회상했고 ‘시대의 스승’ ‘마음의 스승’이라는 찬사가 잇따랐다. 국민의당 한상진 창당준비위원장과 안철수 의원, 더불어민주당 박영선·정청래 의원, 정의당 심상정 대표·노회찬 전 의원, 박원순 서울시장, 안희정 충남도지사, 조희연 서울시 교육감, 이재정 경기도 교육감 등이 일찍부터 빈소를 찾았다.


‘따뜻한 분노’는 고인의 삶을 묘사하는 표현으로 되새겨볼 만하다. 2008년 한학·서예·금석학 분야의 대가인 청명 임창순 선생을 기리기 위해 청명문화재단이 제정한 임창순상을 받을 때 나온 말이다. 당시 청명문화재단은 수상자 선정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다양한 개인과 계층과 문화가 서로를 살리고 북돋우는 사랑과 화합의 공동체를 향해 나아가는 신영복의 따뜻한 분노가 우리 사회에서 더욱 큰 울림과 더욱 넓은 어울림으로 번져가리라 믿는다.”


빈소에서 만난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는 “나보다 8년 선배인데 참 결이 고운 분이셨다. 삶도 그렇고 글도 그렇고 글씨도 그렇고 하나 흐트러짐이 없이 살며 삶에 대한 진주 같은 성찰들을 남겼다”고 회고했다. 그의 손글씨는 소주 ‘처음처럼’에도 남아 있다.


고인의 제자이자 장례식 대변인을 맡은 김창남 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관계’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인식하고 세계를 봐야 하다는 선생님의 말씀은 세상의 방향을 새롭게 찾아가는 데 중요한 성찰이라고 본다”면서 “더불어 함께 나누는 작은 위로가 큰 고통을 이겨낼 수 있다는 말씀이 이 시대에 더욱 간절하게 다가온다”고 말했다.


1941년 경남 의령에서 태어나 밀양에서 자란 고인은 2014년 희귀 피부암 진단을 받고 투병 중 15일 오후 자택에서 타계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유영순(68)씨와 아들 지용(26)씨가 있다. 장례는 성공회대 학교장으로 치러진다. 영결식은 18일 오전 11시에 열린다.


배영대 선임기자, 민경원 기자?balanc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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