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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北核해소의 3단계 프로세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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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지난 6월 25일 베를린에서는 '북한은 어디로 가고 있나?-현황과 전망'이라는 주제로 국제 학술회의가 있었다. 북한은 중증 급성호흡기증후군(사스)으로 인해 대표의 직접 참석은 불가능했으나 평양에서 보내온 북한 논문은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북한의 최근 사태에 대한 입장은 다른 어떤 문건이나 성명보다 논리적으로 명확하고 강경했다. 특히 주목할 점은 북한이 최근 사태에 나타난 미국의 궁극적 의도를 핵무기를 포함한 대량살상무기 확산 방지가 아니라 북한에 대한 '체제 변화'기도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체제 변화 기도를 저지하기 위해서라도 군사적 억제력을 보유해야겠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었다. 즉 북한은 협상을 위한 카드로서의 핵화 의지를 넘어 이제는 표면적으로도 실제 보유 정책으로 경도되고 있다는 강한 인상을 심어줬다.

북한의 이러한 초강경 자세로의 전환은 대량살상무기.마약.위조달러 등의 문제에 대한 최근의 미국 중심의 국제사회가 가하는 대북 압박 정책의 강화에 대한 강력한 대응과 반발로 보인다. 북한은 한반도 평화유지의 핵심 메커니즘을 미국과 자신들의 '군사적 균형'(억지력)에서 찾고 있었다. 즉 국제적 수준의 군사적 연대와 핵우산이 없는 조건에서 초강대국 미국과 단독으로 맞서고 있는 북한으로서는 대화와 협상은 물론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서도 미국이 강한 것만큼 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회의에서 북한은 또한 다자회담의 수용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었다. 북ㆍ미 양자회담이건 다자회담이건 형식과 순서에 구애받지 않겠다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는 점이다.

다자회담을 그동안 대북 압살 정책으로 비판하던 북한으로서는 북ㆍ미 양자회담이 불가능한 조건에서 북핵 문제에 대한 유엔 안보리 회부 가능성이 운위되고, 미국과 일본을 넘어 유럽연합(EU)까지 대북 제재 연대에 동참하면서 이제는 다자회담을 차선의 방책으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보인다.

논문을 통해 볼 때 북한은 외부적인 압박의 연대에 직면해 국제사회, 특히 미국에 대한 강경 반발을 천명하면서도 다자회담의 틀을 열어 놓고, 또 남한의 노무현 정부에 대한 협상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남한의 노무현 대통령이나, 평화 번영 정책에 대한 직접적이고도 노골적인 비판을 자제하고 있다는 점이 그 한 징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정부는 이 부분에 대한 북한과의 대화 공간과 그 가능성을 충분히 살려 나가야 할 것이다.

필자는 이번 회의에서 북한이 핵을 포기할 때에 오히려 대북 지원과 안보 우려 해소, 대미 관계 정상화 및 평화 체제 구축이 가능할 것이라는 점을 역설하고 3단계 평화 프로세스를 제시했다.

제1단계는 1994년 북ㆍ미 기본합의를 넘는 새로운 합의의 틀을 마련하고 북의 비핵화 선언과 미국의 불가침 선언의 동시 이행을 제안했다. 제2단계는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체제 복귀,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 수용 등 북핵을 포함한 대량살상무기의 검증 가능하고 불가역적인 해체 과정과 맞물려 미국의 대북 경제제재 해제 및 테러지원국 명단 삭제로 이어지는 북ㆍ미 관계 개선안을 제시했다. 한편 남한은 대규모 대북 경제 지원과 더불어 농업구조 개선, 사회간접자본(SOC), 에너지 플랜트를 포함한 '북한 종합개발 계획'에 협의, 착수하게 된다.

제3단계는 비핵화의 완성과 더불어 북ㆍ미, 북ㆍ일 관계의 정상화, 남북 간의 평화협정 체결 및 동북아 평화협력체 건설을 통해 3중의 평화 보장 체계를 마련하는 것이다. 그럴 경우 한반도는 단순히 당면한 북핵 위기 해소를 넘어 21세기 동북아의 바람직한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데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통해 한반도에는 비로소 평화와 협력과 통일의 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백영철 건국대 교수.한국통일포럼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