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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추억] 아카데미 주연상 네번 받은 할리우드 여왕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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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지난달 사망한 그레고리 펙에 이어 또 하나의 별이 졌다. 연기와 사랑에서 할리우드의 살아있는 전설로 꼽히던 캐서린 헵번(사진.만년의 모습과 젊은 시절)이 지난달 29일(현지시간) 미국 코네티컷 자택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96세.

헵번은 생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네차례 받고 열 두번이나 후보에 올랐다.

후보 부문은 올해 메릴 스트립이 추월했지만 주연상 기록은 전무후무하다. 그는 87세까지 연극 무대에 설 정도로 왕성한 정열을 잃지 않았으나 말년에 관절염 수술을 받는 등 건강이 서서히 나빠진 것으로 전해졌다.

헵번의 출세작은 스타가 되길 갈망하는 여자의 이야기인 '모닝 글로리'(1933년)였다. 이 영화로 첫번째 오스카 트로피를 거머쥔 그는 잠시 침체기를 겪었지만 곧 '아프리카의 여왕'(51년)이나 '지난 여름 갑자기'(59년), '밤으로의 긴 여로'(62년) 등으로 60여년 간의 화려한 이력을 이어간다.

자신의 수상을 위해서는 단 한번도 아카데미 시상식에 나간 적이 없었으며 평생 매스컴에 냉담했던 그는 스크린 속에서도 강인하고 거침없는 평소의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줬다.

여배우로서 그의 운은 말년에 더 좋았다. '초대받지 않은 손님'(67년), '겨울의 사자'(68년), '황금 연못'(81년) 등 아카데미 수상작 세편이 환갑을 지나면서 탄생했다.

특히 헨리 폰다와 함께 출연한 '황금 연못'은 원숙한 연기의 절정을 선보인다. 그의 마지막 영화는 93년 워런 비티의 설득으로 출연한 '러브 어페어'였다.

헵번의 생애를 돌이켜 볼 때 '초대받지 않은 손님'등 9편에 함께 출연했던 스펜서 트레이시(1900~67)와의 열애를 빼놓을 수 없다. 헵번은 6년 간의 짧은 결혼 생활을 마치고 이혼한 상태였고 트레이시에게는 아내와 두 아이가 있었다.

20년이 넘게 이어진 둘의 사랑은 불륜이었지만 여느 불륜처럼 파국을 맞지 않았다는 점에서 독특했다. 천주교 신자인 트레이시는 결코 이혼하려 하지 않았고 헵번도 그 이상을 요구하지 않았다.

99년 미국 영화연구소(AFI)는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배우'로 '아프리카의 여왕'에 나란히 출연했던 헵번과 험프리 보가트를 선정했다. 오랜 세월 동안 당당히 군림해온 이 할리우드의 여왕에게 너무나 당연한 칭호였다.

기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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