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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VS 중앙일보' 역전될 것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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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한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종이신문을 꼽으라면 역시 중앙일보와 조선일보다. 필자가 중앙일보와 자매지 관계에 있는 월간 중앙, 그것도 온라인 '정치개혁포럼'에 글을 쓰기 시작하는 마당이기 때문에 중앙일보를 앞에다 세웠지만, 발행부수와 관계없이 우리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으로만 따진다면 역시 조선일보를 앞세워야 온당한 일일 것이다.

왜 그런가.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하자면 조선일보는 이념지로 분류할 수 있고, 중앙일보는 대단히 기분 나쁘겠지만 상업지로 분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왕 분류한 것, 조금 더 범위를 넓히자면, 필자가 보기에 우리 사회에 이념지로는 국민일보나 한겨레신문, 경향신문 정도가 더 들어갈 수 있겠다. 여기서 국민일보는 종교적 이념을 모태로 창간된 신문이기 때문에 조금 성격이 다르기는 하다.

물론 이런 분류는 필자의 대단히 자의적인 분류일 뿐이니, 동의하지 않는 분들은 너무 그렇게 마음 상해 하지는 마시라. 물론 전적으로 필자의 자의적인 분류이기는 하지만 그런 대로 설명할 만한 근거는 있다. 다시 논점을 좁혀서 중앙일보와 조선일보의 경우만을 놓고 보자.

조선일보를 이념지로 분류하는 것은 명백히 특정 계층의 이익이란 잣대가 신문 제작의 알파요, 오메가이기 때문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념지라고 한다면 그들이 대변하는 것은 특정 계층의 이익이어서는 안된다. 일종의 공론화된 계급적 이데올로기가 반영돼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 면에서 조선일보는 일종의 변형된 이념지다. 오히려 보다 이념지에 가까운 신문은 조선일보가 아니라 한겨레신문일 수도 있다.

조선일보의 영향력은 그들이 반영하는 특정계층이 보통 특정계층이 아니라는 데서 비롯된다. 그들은 소수이지만 수십년간 우리 사회를 지배해왔던 파워엘리트들이다. 시대의 패러다임은 변하고 있지만 여전히 힘을 잃지 않고 있는 우리 사회의 노멘클라투라다.

조선일보라는 단어를 키워드로 해서 종횡으로 연결돼 있는 이들 특권계층과, 결국에는 막강한 부수를 자랑하는 신문을 통해 그들의 의사를 반영시키는 구조 때문에 조선일보는 단순한 언론이 아니라 언론권력이라고 불리우는 것이다. 즉 조선일보를 둘러싸고 있는 노멘클라투라라는 집단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들을 언론권력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이유도 이해할 수 없다.

조선일보는 자신이 갖고 있는 영향력을 투철하게 자각하고 있고, 그러한 영향력 자체를 무기로 이념을, 아니 이익을 휘두른다. 그것은 또한 특권계급의 자본과 인재 집중에서 비롯되는 세련성까지 갖추고 있어 비단 특권계급뿐만 아니라 ‘그 밖의 다수’까지 영향권 안에 넣을 수 있다. 조선일보를 싫어하는 사람들에게는 기분 나쁜 분석일지 모르지만, 이것은 분명한 현실이다.

중앙일보는 어떤가.

조선일보와는 완연히 다르다. 때로는 조선일보와 논조를 같이 하기도 하고, 때로는 달리 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큰 차이는 특정계층의 이익이 신문을 만드는 잣대는 아니라는 점을 꼽아야 한다. 중앙일보의 잣대는 무엇일까. 그것은 조직, 즉 회사의 이익이 중요한 잣대인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상업지라는 분류를 가능하게 만든다.

특정계층의 이익과 회사의 이익이란, 어찌 보면 본질적으로 유사할지 모르는 차이는 변화의 시대에 커다란 차이로 드러난다. 특정계층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서는 손해를 무릅쓰지 않으면 안된다. 즉 명백한 적(敵)의 존재를 야기시킨다. 굳이 안티조선운동을 예로 들지 않는다 하더라도, 손해를 무릅쓸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영향력이 그러한 손해를 압도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회사의 이익이 중요한 잣대일 경우에는 그러한 손해를 감수할 수 없다. 중앙일보가 갖고 있는 상대적 공정성은 이러한 데서 비롯된다는 것이 필자의 분석이다.

수준이란 측면에서만 본다면, 역시 특정계층의 이익을 위한다는 것이 조직의 이익을 위한다는 것보다 한 수 위일지는 모른다. 하지만 이 시대가 변화의 시대, 개혁 열망의 시대라는 점 때문에 오히려 한 수 뒤지는 단계가 더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다. 이미 조선일보가 대변하고 있는 특권계층은 이 시대에서 몰락하고 있다. 아직은 힘을 갖고 있을지 모르지만, 세월의 흐름에 따라 이 시대의 주역은 교체될 것이고, 지금도 교체 도중에 있다.

이런 몰락의 흐름 때문에 조선일보나, 조선일보를 통해 의사를 구현하고 이익을 실현해 왔던 노멘클라투라 자체가 이성을 잃고 있다. 이성을 잃기 시작하면 신뢰의 상실은 시간 문제이다. 이미 상당 부분 신뢰의 상실이란 위기를 조선일보는 맞고 있다. 중앙일보는 하지만 이런 이성의 상실이란 위기를 겪을 수가 없다. 때로 현혹되기는 하겠지만 기본적으로 회사의 이익이란 전제가 있을 때에는 끊임없이 현실에 대한 나름대로의 분석과 스스로에 대한 반성이 따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오만한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차이쯤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 전체의 지도란 측면에서 권력 이동이 지금 일어나고 있다. 지금은 비주류이겠지만 앞으로 기존의 주류를 제치고 사회의 중심세력으로 급부상할 것이다. 연령적으로나 구조면에서 지금의 주류와 전혀 다른 이런 세력들이 우리 사회의 중심으로 자리잡을 때, 이들 역시 ‘그들의 조선일보’를 필요로 할 것이다. 이들은 이성을 잃은 언론권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갖추게 될 세련성과 그들을 배제하지 않는 신문, 그러면서도 영향력을 가진 신문을 필요로 할 것이란 얘기다. 거기에 조선일보를 대신해 중앙일보가 자리잡을 가능성이 지금으로서는 더 높다. 상당 부분은 한겨레신문이나 경향신문을 택하겠지만, 그에 못지 않은 상당수는 중앙일보를 택할 수 있다.

지금은 영향력면에서 조선일보에 뒤지는 중앙일보지만, 노무현 정권 5년이 지나는 동안 역전될 공산은 점점 높아지고 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든 지금처럼 이성의 상실을 경험하지만 않는다면, 그렇게 해서 만족스럽지는 못하지만 최소한의 공정성을 유지해 나간다면 그렇다는 얘기다.

이런 분류는 대단히 러프한 분류일 뿐이다. 우선은 모든 종이신문들이 광고로 먹고 살고 있는 한 상업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며, 무차별한 신문 확장 수단만으로 본다면 어떤 종이신문도 이념지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념지란 부수를 늘리기 위해 반드시 수단방법을 가려야만 하기 때문이다.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는 독자의 숫자와 광고의 단가에 신문들이 목을 매는 한 본질적으로 모든 종이신문은 상업지의 단계를 넘어설 수 없다. 그렇다고 그걸 무 자르듯 나쁘다고 단언할 수만은 없다. 자본의 논리가 살아 숨쉬는 이 사회에서 그것은 단순히 이윤의 추구일 뿐 아니라 생존의 논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살기 위해서 무슨 짓이든 못할까.

서영석 서프라이즈 대표필자

※본 글은 월간중앙 인터넷 사이트의 정치개혁포럼에서 가져온 글입니다.

월간중앙 정치개혁포럼에서 본 기사 보기

※월간중앙 정치개혁포럼은 서영석 서프라이즈 대표필자의 새 정치 칼럼 '뒤집어 보는 정치-서영석이 드러내보이는 한국정치의 속살'을 새롭게 연재합니다. 서대표는 첫 글을 보내며 "이 글이 용인된다면 앞으로 글 쓰는 데 부담이 없을 것 같다"고 밝혔습니다. 서대표의 건필과 정치개혁포럼 가족들의 애독을 기원합니다. [편집자]

※필자의 변

아무튼 앞으로 영향력이 크게 확대될 것으로 기대되는, 중앙일보와 자매관계에 있는, 월간중앙 온라인 '정치개혁포럼'에 매주 한번씩 기고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앞으로 필자 특유의 시각으로, 제멋대로 쓰는 칼럼을 선보일 생각입니다. 많은 애독을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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