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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시즘 뺀 ‘쇼팽’엔 진지한 언어 그득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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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0호 27면

포르투갈 리스본에는 옛 모습을 간직한 비탈진 골목길이 많다. [worldwanderista.com]

리스본의 보석을 오랜 기간 곁에 두고도 한번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PC 스피커를 음질 개선을 위해 일반 스피커로 바꾸지 않았다면 이 빛나는 보석과 별다른 인연을 맺지 못하고 지냈을 것이다.

피레스의 쇼팽 ‘녹턴’ 음반.

1990년대 중후반 마리아 조앙 피레스(Maria Joo Pires,72)의 쇼팽 ‘녹턴’ 음반을 발매한 도이치 그라모폰의 사진작가가 원망스럽다. 곡의 이미지를 살린다고 그랬겠지만 잔뜩 어두워진 하늘을 배경으로 촬영한 주인공 모습이 평범을 지나쳐 어딘지 둔해 보인다. 좋은 사진이 많은데 왜 그런 사진을 택했을까? 이럴 땐 좀처럼 손길이 가지 않는다. 보석과 만나는 여정은 서울에서 리스본 가는 여정만큼이나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했다.


한참 미루던 스피커 교환을 겨우 마치고 음질 테스트를 위해 이것저것 찾아 듣다가 로맨틱한 음악 연주에 능한 기타주자 레이몬드 벌리(Raymond Burley)가 리드하는Lyric Guitar Trio의 연주로 슈만의 ‘어린이 정경’을 듣게 되었다. 기타 연주가 끝난 뒤 문득 피아노로 같은 곡을 듣고 싶었다. 마침 연주는 들은 바 없지만 낯은 많이 익은 마리아 조앙 피레스가 눈 앞에서 그 곡을 준비하고 대기하고 있다. 별 생각 없이 손길이 갔다. 그리고 그의 연주를 들었다. ‘낯선 마을과 사람들’, ‘궁금한 이야기’ 등으로 곡이 진행된다. 슈만 곡 가운데 익숙하고 선호하는 곡이기도 하다.


연주를 3분쯤 들었을 때 나는 이미 피레스의 포로가 되어 있었다. 특징이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는 연주인데 마치 마력을 지닌 음악처럼 마음의 긴장을 놓아주지 않는 강한 흡인력을 뿜어낸다. 소리도 크지 않고 힘도 약하다. 언젠가 피레스가 손이 작아 약점이라고 고백했다는 기사를 읽은 기억이 있다. 그럼에도 그의 연주를 중도에 멈출 수가 없었다. 슈만의 ‘숲속의 정경’으로 음반을 바꾸었다. 여기서는 활기가 더해지고 힘도 조금 세졌다. 그러나 여전히 힘을 몹시 아끼고 옆 사람에게 속삭이듯 은근하고 내밀한 소리로 연주한다. 이 연주에서 느낀 상쾌감은 내가 숲 속으로 자리를 옮겨온 것 같다.


아, 오래 방치했던 그 음반, 쇼팽의 ‘녹턴’ 전곡 음반을 찾아내고 오디오로 자리도 옮겼다. 누구나 알고 있고 짙은 나르시즘으로 근래엔 찾지 않는 곡. 그런데 시작부터 이 연주는 조금 다르다. 전반부를 다 들었는데 그라모폰 기획자 말처럼 나르시즘의 흔적이 거의 지워지고 그 자리에 뭔가 생각하게 만드는 진지한 언어들이 비죽비죽 얼굴을 내민다. 루빈스타인의 ‘녹턴’을 흔히 가장 아름답고 투명한 연주로 평가하는데 풍부한 감성과 진지성이 묻어나는 피레스 연주는 쇼팽을 가장 높은 지점으로 끌어올린 ‘쇼팽의 이상에 접근하는’ 연주라고 평하는 논객도 보인다. 나도 이 찬사에 주저 없이 동의하고 싶다. 그는 특징 없는 특징으로, 가장 쉬운 음악 언어로 청중과 대화하고 있다.


테크닉은 필요하지 않다고 그는 말한다. 일부 기능주의로 흐르는 풍조를 경계한 말로 들린다. 마음을 모아 악보가 암시하는 최선의 풍경을 그려내는 자기 감성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그의 연주관인 셈이다. 그는 드물게 체구가 작고 손도 작고 동작도 작고 얼굴 표정에도 연주 중 그다지 큰 변화가 없다. 절정에서도 눈을 살짝 감아보거나 입가에 옅은 웃음을 흘릴 뿐이다. 그는 자신이 피아노의 일부라는 느낌, 악기의 일부라는 느낌을 준다. 무대 의상도 별다르지 않다. 일상생활에서 입는 평범한 의상을 걸치고 나온다. 모두 내 취향에 맞다.


그가 드러내는 음악도 사실은 겉은 평범하고 특징을 잡아내기 쉽지 않은 스타일이다. 다만 평범해 보이는 스타일이 사람 마음과 넋을 꽉 붙잡고 연주가 끝날 때까지 놓아주지 않는 마력을 지녔다는 것이다. 자기를 낮추고 음악을 높이 대하는 피레스의 마음과 자세가 창조해 낸 흉내내기 어려운 마력이다.


29세에 녹음한 모차르트 협주곡 17번을 들어보면 뒷날 뛰어난 모차르트 해석자가 될 전조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5세에 무대에 나선 귀재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귀기가 느껴지는 연주이다. 게자 안다의 재래를 보는 것 같다. 매일 그 연주를 빠트리지 않고 듣는다는 사람도 있다. 바흐 ‘프랑스 모음곡’ 연주도 절묘하다. 경쾌하지만 단순하지는 않고 순도가 매우 높다. 마음과 열정을 모아 바흐 음악이 지향하는 동경의 세계로 조금씩 다가가고 있다. 신의 손이 개입한 연주라는 댓글이 보인다.


다만 베토벤 소나타를 한 곡 들었는데 아직 뚜렷한 느낌이 없어 미진한 구석으로 남았다. 그것은 또 다른 세계여서 어떻다고 단언할 수 없다.


잠깐 휴식하는 사이 포르투갈 여행을 다녀왔다. 인터넷 여행 코너를 찾아 리스본 풍경을 둘러보았다. 그런 뒤 잠시 잠들었는데 그 사이 리스본의 어느 골목길을 헤매다가 눈을 떴다. 피레스의 작은 손의 마력이 나를 여기까지 끌고 온 걸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음악을 듣는 즐거운 경험 가운데 하나다. 앞으로 EU 최빈국 중 하나라는 유럽의 변방국가에 나는 좀 더 관심을 갖게 될 것 같다.


송영 작가sy4003@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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