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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아이] 뚝심의 원로 政客은 없는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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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미국 의회의 '기둥'이라 불리던 원로 정객 두 사람이 있다.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출신 스트롬 서몬드 상원의원과 웨스트 버지니아주 출신 로버트 버드 상원의원이다. 각기 공화당과 민주당 소속이다.

며칠 전 하나의 기둥이 무너졌다. 지난주 타계한 서몬드 의원은 올해 1월 은퇴할 때까지 반세기를 상원의원으로 일했다. 미국 역사상 최장수 의원이다. 지난해 12월 이미 1백세 생일을 치렀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전했으니 우리 기준으로 보면 진작 일선에서 물러났어야 할 인물이다.

동료 의원들은 생전의 그를 미국 정치의 살아 있는 역사 혹은 의회 그 자체(institution)라고 불렀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오랜 재직 기록 때문만은 아니다. 정치판의 지저분한 뒷거래가 미국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그는 정치 술수에 눈을 돌리지 않았다. 지역구민이 그의 주된 관심이었다. 졸업하는 학생들, 특별한 기념일을 맞은 노인들에게 잊지 않고 정겨운 편지를 보냈다. 2년 전 군사위원장직을 내놓을 때까지 의회 일정에 거의 빠짐없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래서 후배 정치인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가 일선에서 사라졌다. 이제 미국 의회에는 한 기둥만이 남았다. 올해 85세의 버드 의원이다. 서몬드 의원보다 5년 늦은 1959년에 상원에 합류했다. 하지만 하원 경력 6년까지 합하면 서몬드 의원보다 오히려 의회 경험이 많다.

서몬드 의원과 같은 원로 정객이면서도 미 의회의 '전설'같은 존재로 칭송받는 이유는 딴 데 있다. 상원의 세세한 절차와 규정들을 샅샅이 익히고 있다. 상원의 흐름을 주도하는 원내총무직만 13년을 맡았다. 의회 일정을 휘잡았던 그는 시를 읊는 듯한 리듬감 있는 말솜씨로 동료와 후배들을 매료시켰다.

유명한 시구들을 줄줄이 꿰고 있는 언변 좋은 정치인이지만 TV 출연은 되도록 삼간다. TV 자체를 즐겨보지 않는다. 유일한 취미는 독서. 컴퓨터도 사용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구닥다리 정치인이다. 돈이 없어 대학도 중퇴했다. 그리고 10년 걸려 46세 나이에 법과대학을 마쳤다.

서몬드 의원의 가정부는 한국인이었다. 10여년 전 나는 오랜만에 그를 다시 만났다. 서몬드 의원은 떠나버린 가정부를 그리워하며 내게 한국 아줌마 한분을 소개시켜 달라고 부탁했다. 별 생각 없이 대사관 측에 미뤄놓고 말았는데 내내 마음에 걸렸다. 그때 이미 귀가 어두워 보좌관이 곁에 붙어 대화를 도울 정도로 쇠약해져 있었다.

버드 의원은 80년대 말 한국을 몹시 괴롭혔던 종합통상법안 성사를 진두지휘했던 정치인이다. 논리와 절차에 능한 버드 의원은 93년 클린턴 대통령 취임 초기 '소통령'이라 불렸던 대통령부인 힐러리의 야심작, 건강보험 개혁안을 무산시키는 데 앞장서 백악관의 미움을 샀다.

힐러리 여사가 스타일 구겼다. 하지만 2년 전 상원에 진출한 힐러리 의원은 신참 동료들을 모아 의회 절차 배우기에 나섰고, 버드 의원을 강사로 모시는 아름다운 정치를 실현했다. 같은 당 출신 대통령이라고 녹록지 않았던 버드 의원은 "의회가 대통령의 하수인이 돼선 안된다.

나는 이제까지 11명의 대통령과 '더불어'(with) 국정을 논의했다"며 공화당 출신 부시 대통령 견제에 나섰다. 이라크전 반대가 비근한 예다. 미국인들을 더욱 위험에 처하게 만들 것이란 게 이유였다.

정당을 쪼갠다, 새로운 정당을 만든다, 국민은 뒷전인 채 아우성인 우리 정치판에 중심 잡아줄 원로는 없는가.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온 나라가 요동치는 사회인지라 더더욱 살아 움직이는 입법부가 그립다. 정치를 숨쉬게 하는 품위 있는 원로 정객의 등장과 함께.(시애틀에서)

길정우 통일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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