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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친구] '노는 물' 달랐던 고교 동창 이젠 생각까지 같아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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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어느날 60년 가까이 살아온 인생을 되돌아 볼때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살가운 우정도 나눌 수 있는 친구 한명 있다면 여간 마음 든든한 게 아닐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소설가 최인호(崔仁浩)씨와 휠라코리아 윤윤수(尹潤洙) 사장은 행복한 사람이다.

이들은 각각 문학과 기업경영에서 '일가(一家)'를 이뤘다고 평가될 만큼 성공한 인생을 살아왔다.

崔씨는 1970년대 초 '별들의 고향'으로 국내 소설의 밀리언셀러 시대를 연 후 지금까지 문단의 중심에 서서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尹씨는 지난 3월 휠라 USA.미국 투자펀드 서버러스와 공동으로 이탈리아 본사 휠라그룹을 인수, 아시아 부문 총괄사장에 취임했다. 당시 언론은 '새우가 고래를 잡아 먹었다'며 대서특필했다. 그의 연봉은 현재 약 30억원이다. 이로 인해 '샐러리맨들의 우상'으로 부러움을 사고 있다.

1945년생 해방둥이인 두 사람의 인연은 61년 서울고에 입학하면서 시작됐다. 이들이 지난 23일 서울 강남의 한 일식집에서 만나 자신의 인생과 우정 등에 대해 속내를 털어놨다.

崔씨는 "글쓰는 게 나 혼자 하기도 힘든데 친구까지 글쟁이를 둘 필요가 있겠느냐"며 "윤수가 글을 썼다고 하면 이만큼 친해지지 못했을 것"이라고 운을 뗐다. 尹씨 역시 "네가 사업을 했다면 나도 괜히 견제하고 시기했을 것"이라고 거들었다.

두 사람의 성장 환경은 사뭇 다르다. 수원이 고향인 尹씨는 태어난지 백일도 안돼 어머니를 병으로 잃었다. 이 때문에 "불쌍한 것, 오래 버티지 못하겠구나"라는 말을 들으며 궁핍한 유년기를 보냈다. 고교 2년 때 아버지마저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대학입시에서 연거푸 떨어지고 고시 공부에 매달리는 등 나의 20대는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던 암흑기"라는 게 尹씨의 설명이다.

반면 崔씨는 완전한 서울 토박이다. 崔씨는 "나는 서울 4대문 안에서 살았던 덕분에 종로 극장가에 내걸리는 영화들을 보면서 자란 전형적인 '할리우드 키드'"라며 "그때 형성된 도시적 감수성이 내 문학의 출발점이 됐다"고 말했다.

尹씨는 "난 고교 때 거처할 집이 없어 이곳 저곳을 전전했던 고학생이었지만 인호는 2학년 때 일간지 신춘문예에 최연소로 당선될 만큼 '잘 나가는' 친구였다"고 말했다. 그는 "인호와는 나는 '노는 물'이 달랐죠. 특히 인호는 당시 여학생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다"고 덧붙였다.

둘이 가까워진 것은 40대 중반. 尹씨는 "90년대 초반 내 사업이 성장하고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되면서 고교동창들과도 뭔가 대화가 되고 격차가 좁혀지기 시작한 느낌이 들었다"고 말했다. "인호는 옛날부터 유명했지만 난 늦게 꽃을 피운 셈"이라는 것이다.

"인생은 축구경기와 같습니다. 나야 전반전에 골을 잘 넣었지만 윤수는 전반전에 허덕대다가 후반전에 잘 뛰고 있는 선수죠. 우리가 인생 전반전에는 70년대 고도성장기를 보내느라 서로 바빠 보지 못하고 살았던 것 같아요."(崔씨)

1주일에 한번꼴로 만날 만큼 가까이 지내면서 신뢰감도 깊어졌다.

"이 친구는 참 기특해요. 소도 언덕이 있어야 비비는 데 맨손으로 기업을 키웠잖아요. 특히 자기 것을 주변사람과 나눌 줄 알아요. 골프를 치러 가면 골프공.장갑이 헤어지고 닳아 민망할 정도예요. 물질에 욕심이 없는거죠. 또 거짓말을 못해요. 조금만 속마음과 다른 얘기를 하면 얼굴이 빨개져요."(崔씨)

"인호는 작품을 쓰는 과정에서 치열하게 자료를 모으고 공부합니다. 역사.종교 등으로 작품 영역을 넓혀가는 것도 보기 좋고요. 더 고마운 것은 저를 생각해 주는 따스한 마음입니다. 2000년 11월 제가 심장협심증을 앓을 때 신앙을 가져보라고 조언해 서울 서초동 성당을 다섯 차례 찾기도 했습니다. 인호의 권유로 아내와 아이들은 현재 성당을 다니고 있습니다."(尹씨)

尹씨는 자신의 성공비결에 대해 "젊을 때 영어를 열심히 배운 게 큰 도움이 됐지만 그보다 중요했던 것은 끈기와 인내심이었다"며 "일을 좋아했을 뿐 돈 욕심은 없었다"고 말했다.

崔씨는 8년째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아침마다 청계산을 오르고 있다. 이 때문에 아내로부터 "산에 여자 숨겨놓았느냐"는 말까지 듣고 있다. 산행 덕분에 건강에 어느 정도 자신감이 생겼다고 한다.

"윤수에게 이젠 일좀 그만 벌리고 건강에 신경쓰라고 합니다. 앞으로도 서로가 인생의 편안한 동행인이었으면 합니다."(崔씨)

하재식 기자 <angelha@joongang.co.kr>
사진=오종택 기자 <jongta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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