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판타지 연재소설] 판게아 - 롱고롱고의 노래 <20> 폴리페서의 속임수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암흑의 찬바람 속에서 다시 나타난 우주선

계속 이상한 말을 하는 리키니우스와
아이들의 재촉에 숫자들을 말해주고만 수리
잠깐 사이 사라진 그가 남긴 금 조각으로
폴리페서의 속임수라는 것을 깨닫는데

리키니우스는 이상한 소리를 했다.

“그는 악마의 마법을 쓰고 있어. 네피림도 그에겐 적수가 안 돼. 곧 그의 시대가 올 거다. 그의 손에 비밀의 숫자들이 흘러 들어가서는 안 돼.”

리키니우스는 계속 이상한 소리를 했다.

“리키니우스. 폴리페서는 사악한 탐욕덩어리예요. 마법사는 아니에요. 그런데 비밀의 숫자를 주지 않으면 나비도 죽일 테고 아빠도….”

수리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아빠’라는 단어를 말하는 순간 아빠가 미치도록 보고 싶었다.

“너는 우리의 구원자다. 세상의 창조자들이 너를 돕고 있어. 수리, 넌 구원자야.”

리키니우스는 이상하게 말이 많았다.

“난 아빠를 구하려 할 뿐이에요. 구원자는 아니에요.”

“나에게 숫자를 말해다오. 그 숫자는 원래 책 속에 들어있던 것…내가 간직해야 한다.”

수리는 어쩐 일인지 리키니우스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뭔가 꺼림칙했다.

“폴리페서에게 넘어가기 전에 나에게 주면 된다.”

리키니우스는 한 단어씩 겨우 겨우 말을 이어나갔다.

“곧 나비를 죽일 거야. 서둘러야 한다.”

리키니우스는 멈추지 않았다.

“수리야. 빨리. 나비가 죽을지도 몰라. 나비가 죽으면 아빠까지 위험해질지 몰라.”

사비가 수리를 재촉했다. 수리는 망설였다.

“리키니우스, 저는 불안해요. 못 믿어서가 아니에요. 나비와 아빠의 목숨이 걸린 일이기 때문이에요.”

리키니우스가 수리의 손을 잡았다. 그런데 손의 힘이 강했다. 손은 전사의 손이었다. 악력도 대단했다. 종잇장처럼 얇은 몸을 가진 노인네의 손이 절대 아니었다. 수리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리키니우스의 손을 유심히 들여다보자 사비가 수리의 등을 툭 쳤다.

“정신 차려. 수리야. 빨리. 급하다고.”

수리는 사비와 골리 쌤, 마루, 볼트에게 떠밀려 자신이 알아낸 숫자들을 리키니우스의 귓속에 속삭였다. 리키니우스의 얼굴은 금세 밝아지기 시작했다. 기침도 이내 잦아들었다.

“비밀의 숫자들을 다시 책 속에 넣겠다. 나에게 물 한 잔만 주겠니? 목이 마르는구나. 따뜻한 물로 주었으면 좋겠다.”

리키니우스는 또 당장 죽을 듯이 기침을 해대기 시작했다. 온몸을 부르르 떨며 기침을 했다.
수리는 일어나서 주전자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주전자는 보이지 않았다.

“얘들아 너희들도 빨리 찾아봐.”

사비와 마루, 볼트, 골리 쌤까지 나서서 주전자와 물을 찾기 시작했다. 썸은 긴 모가지를 길게 빼고 주전자를 찾았다. 사비가 먼저 소리쳤다.

“여기 있어, 여기 물이 있다고. 그런데 물이 반짝반짝 빛이 나.”

마루도 소리쳤다.

“여기 주전자가 있어. 찾았어.”

“빨리 모닥불에 끓이자.”

볼트도 덩달아 소리쳤다.
수리와 사비, 마루, 볼트, 골리 쌤이 주전자와 물을 가져왔을 때, 리키니우스는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여기저기 찾아보았지만 흔적도 없었다.

“너무 힘들어서 연기가 되어 사라졌나봐. 오랜 세월 우물에 갇혀 있었다고 했잖아. 할아버지가 불쌍해.”

볼트는 훌쩍거렸다.

“그 몸으로 어디를 가신 거지? 돌아다닐 수 없는 체력이었는데? 돌아가시면….”

사비는 울음을 터트릴 지경이었다. 수리는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바닥에 반짝반짝 황금 부스러기가 떨어져 있었다. 수리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리키니우스가 아니었어.”

“뭐라고?”

“그럼 누구였어? 우리가 속은 거야?”

골리 쌤은 벌써 화가 나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썸은 골리 쌤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는 폴리페서야. 리키니우스는 잠자리 날개보다 얇은 양피지 조각을 떨어트리고 다니지. 온 몸이 책이니까. 황금 부스러기를 떨어트릴 수 있는 자들은, 황금을 캐는 사람들과 그들은 지휘하는 사람, 바로 폴리페서지.”

수리는 어이없다는 듯이 픽 웃었다.

“속았네. 바보처럼.”

기사 이미지

수리는 진짜 화가 났지만 그저 웃음만 비실비실 나올 뿐이었다.

“어떡해? 비밀의 숫자를 주었잖아? 넌 네피림에게만 주기로 약속했던 건데?”

사비의 염려에 수리가 한숨을 지었다.

“그래. 난 네피림과의 약속을 저버렸어. 아빠를 구하겠다는 나의 욕심을 이용한 폴리페서에게 속아서. 하지만 이럴수록 정신을 차리자.”

모두 긴장한 채 수리를 보았다.

“우리는 왔던 길을 돌아가면서 비밀을 찾아낼 거야. 그리고 다시는 속지 않을 거야. 폴리페서는 그 숫자들만으로 거대한 비밀을 풀 수 없어. 롱고롱고의 비밀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거든.”

수리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모두 잠시 쉬기로 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마루는 쉬지 않았다. 자신이 외운 비밀의 숫자와 비밀의 암호들을 이리저리 재배열하며 골똘히 연구하고 있었다. 수리가 마루 옆에 슬쩍 앉았다.

“너 왜 이래? 겁나게…. 넌 천재 캐릭터가 아니잖아?”

마루가 킥킥 웃었다.

“네가 매번 주인공만 하니까. 나도 남우주연상 좀 타보자. 친구야.”

마루는 수리의 가슴을 툭 하고 때렸다. 그러자 수리가 바로 맞받아쳤다. 마루가 벌렁 나자빠졌다. 마루가 일어나 다시 수리의 가슴을 퍽 때렸다. 수리도 마루의 가슴을 퍽 때렸다. 수리와 사비는 이제 아예 엉켜서 뒹굴기 시작했다.

“너희들 UFC라도 나갈래? 작작 좀 해라.”

골리 쌤이 신경을 곤두세웠다. 지켜보던 사비는 혀를끌끌 찼다.

“지들이 론다 로우지(미국의 이종격투기 선수)야? 뭐야?”

수리와 마루는 치고받고 엉키면서 데굴데굴 굴러 노란 집의 한쪽 모서리에 다다랐다. 더 이상 움직일 곳도 없었다. 수리 몸통 위에 뚱뚱한 마루가 꽉 누르고 있었다. 수리는 헥헥거렸다.

“돼지비계 좀 치워라, 압사하겠다.”

마루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돼지라고 놀린 대가를 치르는 거다. 고소하다.”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야. 아까 하던 거 계속 해야지.

마루씨?”

수리가 아양을 떨자 마루는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다시 옆으로 쓰러지며 작은 문을 건드리고 꽝 치고 말았다. 갑자기 문이 확 열렸다. 수리와 마루는 부리나케 일어났다. 밖은 어두웠다. 암흑이었다. 두려움이 솟아났다. 골리 쌤도 사비도 볼트도 꿈쩍하지 않았다. 모두 암흑의 찬바람을 맞고 있었다.

누이가 남긴 흔적, 그리고 새로운 흔적

그때였다. 노란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분명히 익숙한 빛이었다. 오로라처럼 아름답게 신성하게 다가왔다. 아직 빛의 정체는 몰랐다. 순간 번쩍했다. 모두 눈을 감았다. 잠시 후, 눈을 떴을 때, 수리와 아이들이 타고 왔던 그 우주선이 보였다. 피라미드 형태의 우주선에서 내려오는 노란 빛이었다. 그리고 노란 집은 수백 개의 퍼즐로 이리저리 움직이더니 사라져버렸다. 이제 허허벌판이었다. 암흑이었다. 우주선만이 앞에 있었다. 수리가 성큼성큼 걸어서 우주선으로 다가갔다.

“수리야. 가지 마.”

마루가 외쳤다.

“걱정 마. 너희들 잘 생각해봐, 이 우주선 좀 낯이 익지않아?”

“생각나.”

사비가 말했다.

“그래. 우리가 만났던 그리고 우리가 탔던, 그리고 우리보다 먼저 왔던 누이가 탔던 그 우주선이야. 자, 이리들 와봐.”

마루도 사비도 수리의 뒤를 따랐다. 우주선의 밑바닥에서 쏟아지는 노란 빛을 받으며 우주선 몸통에 당도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확인했다.

1967 05 06 45 04 05 04 Nui Here

“앗!”

수리는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2015 05 06 45 04 05 04 Suri Here

누이가 남겼다고 짐작한 흔적 바로 옆에 수리는 남긴 적 없는 흔적이 이렇게 남아있었다. 마루와 사비는 뒷걸음질쳤다. 골리 쌤은 떨고 있었다.

“이건 말도 안 돼. 이럴 리가 없어, 우리 중 누구도 이런 글자를 새긴 적이 없다고, 무서워, 무서워, 수리야.”

골리 쌤은 사시나무 떨듯 떨었다.

“떨지 마세요. 제가 거꾸로 돌아가며 비밀을 풀겠다고 했잖아요? 그리고 이렇게 왔어요. 누이의 흔적이 있던 우주선으로. 이건 이미 정해진 운명 같아요.”

수리는 전혀 떨지 않았다.

“우리가 누이의 흔적을 그대로 쫓아가고 있는 것 같아. 만약 그렇다면 누이는 모든 비밀을 알고 있다는 의미이고, 누이는 어디선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겠지.”

수리는 자신에게 중얼거렸다.

“이 숫자들은 바로 비밀의 숫자와 무관하지 않아. 그리고 롱고롱고의 문자와도 무관하지 않아. 네피림과도 무관하지 않아.”

수리는 계속 중얼거렸다.

“움직여.”

볼트가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우주선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르르 쾅쾅 천둥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수리와 사비, 마루, 골리 쌤, 볼트는 서로 껴안고 있었다. 썸은 서로 껴안고 있는 이들을 자신의 품에 껴안았다. 그리고 우주선은 이들을 순식간에 빨아들였다.
수리는 소리쳤다.

“1967 05 06 45 04 05 04 Nui Here 2015 05 06 45 04 05 04 Suri Here, 이 흔적은 최초의 숫자가 될 것이며 최초의 비밀의 문자가 될 거야.”

기사 이미지

하지윤 시인·소설가.
판게아 시리즈 1권 시발바를 찾아서, 2권 마추픽추의 비밀, 3권 플래닛 아틀란티스를 썼다. 소년중앙에 연재하는 ‘롱고롱고의 노래’는 판게아 4번째 시리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