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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게임처럼 여긴 대가는 파멸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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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8호 14면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의 ‘그네’(1767), 캔버스에 오일, 83 x 66 cm

“폭풍우가 몰아친 지난 밤 전 한잠도 자지 못했습니다. 불타는 열정이 끓어오르다가는 영혼의 능력이 한 방울 남김없이 소진되기를 끊임없이 되풀이했습니다…지금 이렇게 편지를 쓰면서 전 저항할 수 없는 사랑의 힘을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하게 느낍니다.”


남자의 편지는 뜨겁게 시작됐다. 여자는 이 사랑에서 도망치려고 했다. 뜨거운 만큼 두려운 사랑이었다. 여자가 도망칠수록 남자는 더 달아올랐다. 사랑에 서툴고 소심한 여자 앞에 남자가 내민 마지막 카드는 죽음이었다. 목숨을 건 남자의 사랑 앞에 여자는 무너졌다. 그토록 오랫동안 갈망하던 사랑을 얻은 행복한 남자는 사랑하는 여자를 귀히 여기며 행복하게 살았다, 라는 말을 기대하시는지? 순애보에 목마른 순진한 독자들의 기대와 달리 여자의 행복은 며칠이 못 간다.


여자에게는 운명을 바꾸어 놓은 치명적인 사랑이었지만, 남자에게는 그저 단순한 게임일 뿐이었다. 남자는 그 이름도 유명한 발몽 자작. 파리 사교계에서 악명 높은 바람둥이였다. 그가 이번에 고른 상대는 정숙하기로 소문이 난 투르벨 법원장 부인. 훌륭한 가문과 막대한 재산, 잘 생긴 외모 등 모든 것을 다 갖춘 발몽의 유혹에 기꺼이 몸을 던질 아름다운 여인들이 줄을 섰지만, 그가 그녀를 선택한 이유는 딱 하나다. 난공불락의 도덕적인 여인을 정복하는 난이도 높은 게임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게임은 판돈이 걸려야 더 흥미로워지는 법. 여자 발몽 자작이라고 할만한 술책가 메르테유 후작부인이 나선다. 정숙하기로 소문난 투르벨 법원장 부인을 정복하면, 자신과의 뜨거운 하룻밤을 선물하겠다고 나선다. 승리한다면 두 여인이 모두 자신의 손에 들어오니 발몽으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메르테유 후작부인이 제안했던 것은 원래는 다른 게임이었다. 자신을 버리고 간 다른 남자를 골탕먹이는 데 발몽을 이용하려고 했던 것. 그녀는 발몽에게 자신을 버리고 간 남자가 결혼할 어린 처녀를 ‘교육’해달라고 부탁한다. 열다섯 살 짜리 소녀를 신부로 맞이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신부는 프랑스 최고의 바람둥이 손에 ‘교육’을 받은 황당한 상태라는 것을 신랑이 첫날밤에 깨닫게 될 거라는 것이 그녀의 계획이었다.


쇼데를로 드 라클로(1741~1803)의 소설 『위험한 관계』(1782)에서 사랑은 욕망·호기심·쾌락·관능·승리·정복·술책·파멸 등의 자극적인 단어들과 결합하며 위험천만한 게임이 됐다. 솔직한 심리묘사와 짜릿하고 극적인 스토리 덕분에 여러 번 영화화되었다. 국내에서도 이미숙·전도연·배용준 주연의 ‘스캔들’이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됐다.


초판 2000부가 사흘 만에 매진된 소설은 드 라클로가 체험한 6년간의 사교계 생활의 정리판이었다. 소설이 쓰인 18세기는 불세출의 바람둥이 카사노바와 돈 주앙이 탄생한 시대였다. 우아한 로코코풍의 궁정 문화를 배경으로 사랑의 이상비대증을 앓던 시대였다. 로코코 회화의 대가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1732~1806)가 그린 사랑에서도 사랑은 게임이 되었다.


그림 속 그네는 사랑의 ‘밀당’ 상징밝은 빛을 향해 아가씨는 가볍게 공중으로 날아오른다. 감미로운 분홍색 드레스가 꽃송이처럼 부풀어 피어 오르고 슬리퍼가 힘차게 날아오른다. 벗어 던진 슬리퍼는 짝을 찾기 위해 날아간다. 동화 ‘신데렐라’에서처럼 신발은 여성에 관한 성적인 암시를 담고 있다. 젊은 아가씨의 시선은 덤불쪽에 숨어 있는 잘 생긴 젊은 남자에게로 화살표처럼 꽂힌다. 그는 이 달콤한 유혹에 기꺼이 응한다. 아가씨 뒤쪽의 어두운 나무 그늘 아래서 그네를 밀어주고 있는 나이 든 남자는 아무 것도 모르는 순진한 표정을 짓고 있다. 아가씨는 두 남자 사이를 오가는 그네처럼 밀고 당기는 사랑의 게임을 하고 있는 중. 은밀할수록 깨소금 맛이고 어려울수록 쾌락의 강도는 높아진다. 조그만 큐피드 조각상은 입에 손가락을 대고 “쉿”하며 젊은 남녀의 사랑의 게임을 부추긴다.


그림의 내용은 그림을 주문한 사람의 아이디어에서 나왔고, 주문자 본인은 젊은 남자의 역할로 그려지길 원했다고 한다. 그 역시 사랑이라는 게임에서 승자가 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 젊은 남자가 사랑의 승리자가 되리라는 보장이 이 그림 어디에 있단 말인가. 어디에도 진실한 사랑의 증표는 없다. 전통적으로 그림 속의 개는 남녀간 신의충실을 상징하는데, 그네를 미는 남자 쪽에 그려져 있는 하얀 애완견은 이상한 낌새를 채고 불안해하고 있다.


화면을 지배하는 것은 아가씨의 분홍 드레스. 분홍은 감미로움과 간지러운 유희의 색이며, 연약하고 변하기 쉬운 사랑의 색이다. 순수의 하양과 열정의 빨강 사이에서 태어난 분홍은 그 뉘앙스에 따라 고상함·연약함·부드러움에서 천박함·강렬한 매혹에 이르기까지 상반되는 감정 사이를 오가며 그네를 타는 색이다. 아가씨는 젊은 남자의 기대와 달리 그네라는 관성에 의해 제자리로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갈 수도 있다. 누가 이 사랑이라는 게임의 승리자가 될 것인가.


‘사랑 게임’엔 오직 정복과 승리의 논리뿐소설 『위험한 관계』가 주는 답은 이렇다. 게임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 게임이 되었을 때는 승자도 패자도 없이 모두 파멸에 이를 뿐이라는 것. 발몽에게 버림받은 투르벨 법원장 부인은 광기에 빠져 죽음에 이르게 된다. 메르테유 후작부인은 발몽을 계략에 빠뜨리고 결국 발몽은 결투 중에 치명상을 입고 죽는다. 메르테유 후작부인도 그간의 계략과 술책이 폭로되어 평판을 잃고, 거기에 파산과 천연두로 처참한 모습으로 죽게 된다.


어떤 예술도 사랑 없이 태어날 수 없다. 사랑의 의미와 색깔이 그 시대의 색깔이다. 사랑의 이상비대증을 앓던 18세기에는 겉으로는 절대 왕정의 화려함이 극치에 이르렀지만, 속으로는 종교도 도덕도 걷잡을 수 없이 타락하고 있던 시대였다. 실제로 이 소설이 발표되고 나서 7년 뒤인 1789년에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하면서 노닥거리던 사랑의 게임도 일단락된다.


발몽과 메르테유 후작부인은 오로지 승리자가 되기 위해 아무 거리낌없이 상대에게 씻을 수 없는 모욕감을 주고 파멸시켰다. 사랑이라는 것은 어떤 사람 혹은 어떤 대상에 대한 헌신적인 자기 낮춤이다. 나와 다른 새로운 세계를 받아들여 좀 더 큰 자아에 도달하는 내적인 성숙의 계기다. 상대방과 나의 보다 좋은 삶을 도모하는 길이라면 안타까운 이별도 감내하는 것이 사랑이다. 기쁨과 슬픔 속에서도 더 큰 인간적인 성숙을 선물하기 때문에, ‘사랑하기’는 늘 좋은 일이다. 그러나 게임이 된 사랑에서는 이러한 사랑의 숭고한 측면은 간과되고, 오로지 정복과 승리의 논리만이 지배하게 된다.


유명인과의 염문을 자발적으로 소문내기, 데이트 폭력, 헤어진 연인의 동영상 유포 같은 인격살해적 행위들은 우리 시대의 사랑 역시 게임으로 전락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어떤 일이든 오직 정복과 승리 만이 목표가 될 때, 그 일이 가지는 인간적인 측면은 모두 희생되고 만다. 돈 버는 일이나 정치도 마찬가지다. 정복과 승리 자체가 목표가 되는 게임이 되어버리면 안 된다. 돈을 벌기 위해 돈을 버는 것, 오로지 자신의 권력을 잡기 위해서만 하는 정치, 상대방의 정복하기 위해서 하는 사랑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


이진숙 ?문학과 미술을 종횡무진 가로지르며 각 시대의 문화사 속 인간을 탐구하는 데 관심이 있다. 『위대한 미술책』『미술의 빅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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