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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제 눈에 안경’ 속담 임진왜란 전엔 없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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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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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 온 서양 물건들
강명관 지음, 휴머니스트
348쪽, 1만8000원

‘제 눈에 안경’이라는 우리말 속담은 언제 생겼을까. 일단 안경이 우리 조상의 삶 속에 들어온 다음일 것이다. 그때가 언제일까. 1876년 개항 이후? 그보다 훨씬 전이다. 『조선에 온 서양 물건들』에 따르면 안경은 임진왜란(1592~98) 전후에 유입됐다. 17세기 전반에는 안경의 국산화가 시작됐다.

 서양 물품인 안경·망원경·유리거울·자명종·양금이 우리나라에 언제 어떻게 들어왔는지 또 그 의미는 무엇인지를 밝히고 있는 이 책은 추리소설처럼 읽힐 수도 있다. 저자는 문헌에서 증거를 뽑아낸다. 부산대학교 한문학과 강명관 교수는 박지용·홍대용 등의 연행록(燕行錄)을 비롯해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국조보감(國朝寶鑑) 같은 우리 한문 문헌을 종횡무진 누빈다.

 저자는 꼼꼼한 논증 방식으로 다음 같은 사실을 밝혀낸다. 유리거울은 조선에 네르친스크 조약(1689) 이후에 들어왔다. 18세기 후반에는 유리거울이 청동거울을 완전히 대체했다. 자명종의 전래는 17세기초 베이징(北京)을 통해서다. 양금(洋琴)은 18세기 후반에 들어와 국악에 쓰이는 주요 악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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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문신 김성일(1538~93)이 쓴 것으로 알려진 안경과 안경집. 아래는 서울역사박물관이 소장한 18세기 말 휴대용 거울. [사진 휴머니스트]

 좋은 책은, 어쩌면 모든 책은(모든 책은 훌륭하기에) 생각거리를 던진다. 조선후기·구한말 과학기술사이기도 한 『조선에 온 서양 물건들』은 21세기 한국인에게 다음 같은 사항을 성찰하게 만든다. 왜 우리 조상들은 서양의 선진 문물을 그저 ‘완호(玩好, 진귀한 노리갯감이나 좋은 장난감)’로 받아들였을까. 조선의 과학기술 습득이 중국·일본에 뒤쳐진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저자는 ‘원리에 대한 조선의 무관심’을 다룬 맺음말 ‘격리된 공간으로 존재한 조선 후기의 지식 사회’를 비롯해 책의 상당 부분을 답을 내놓는 데 할애한다.

 안타까운 생각도 들게 한다. 조선과 청나라는 1712년 국경을 정했다. 저자에 따르면 청나라 쪽은 측량에 망원경을 사용했다. 조선측은 청나라가 만든 도면을 사용했다. 당시 성리학과 음양오행론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한 경화세족(京華世族), 즉 ‘대대로 서울에 살며 벼슬하는 가문’이었던 지배층은 망원경의 가치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저자는 자명종의 실용성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자명종은 시간을 정확하게 계측했지만, 조선 사회에서 그다지 소용이 없는 기능이었다. 조선은 여전히 농업 생산을 위주로 하는 사회였다. 농업 사회에서 분 단위, 시 단위의 시간 측정은 그리 필요하지 않았다. 간단히 말해 분 단위, 시 단위를 나눌 만한 노동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다른 각도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는 주장이다. 전통 혼례의 필수사항이었던 사주단자(四柱單子)를 작성하기 위해서는 정확한 시간을 아는 게 필요했다.

 우리 후손들은 우리의 인문과학·사회과학·자연과학 수준을, 또 과학 발전을 위한 우리의 노력을 어떻게 평가할까. 이 책을 읽어야 하는 한 가지 이유는 과거를 거울 삼아 오늘을 반성하기 위해서다.

김환영 기자 whanyung@joongang.co.kr

[S BOX] 어른 앞에서 감히 안경을? 조선 후기엔 버릇없는 짓

이 책에 담긴 흥미로운 사실을 몇 개 뽑아봤다.

 - 조선 후기 젊은 사람은 안경을 쓰고 어른 앞에 나설 수 없었다. 신하 역시 임금 앞에서 안경을 쓰지 않는 게 원칙이었다.

 - 조선 문헌에서 갈릴레오 갈릴레이란 이름이 등장하는 것은 효종·현종 때 학자인 윤휴(1617~1680)의 기록이 유일하다.

 - 시계는 중국의 지배층이 예수회 신부, 천주교에 대해 호감을 갖도록 만든 선물이었다. 예수회는 전문 시계공을 선발해 중국 선교단에 포함시켰다.

 - 우리 국악에 쓰이는 양금(洋琴)과 피아노는 조상이 같다.

 - 실학자 홍대용(1731~83)은 1766년 베이징에 있는 천주당을 방문해 거문고 곡을 파이프오르간으로 옮겨 연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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