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책읽기] '못자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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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자국/현길언 지음, 이우범 그림/계수나무, 7천5백원

못은 빠져도 못자국은 남더라. 제주 태생의 소설가 현길언씨의 자전적 소설 '못자국'이 담고 있는 의미다. 전쟁은 지나갔어도 사람들의 아픈 기억은 지울 수 없다는 뜻이다.

삼촌은 일본군으로 나가 전쟁터에서 죽고, 아버지는 4.3사건때 낯선 청년들에게 목숨을 잃고, 서울고등학교를 다니던 형은 국군에 자원해 낙동강 전투에서 한쪽 다리를 잃고….

주인공 세철이네는 일제, 4.3, 6.25를 거치며 전쟁의 아픔을 온몸으로 받아낸 가족이다. 어릴 적부터 병치레가 잦고 집안 식구들에게 귀여움만 받던 막내 세철이는 갑자기 들이닥치는 이런 사건들때문에 어쩔줄 몰라한다.

현씨는 자신이 겪었던 혼란의 세월을 '전쟁놀이' '그때 나는 열한살이었다'에서 순차적으로 풀어놨다. 이번에 나온 '못자국'은 자전적 소설로는 세번째권이자 완결편.

11살~14살까지의 이야기를 담았다. 앞의 두 권처럼 엄청난 사건들이 연달아 나오지는 않으나, 전쟁에 대한 미움이 확고해져 가는 소년의 모습은 더 자세히 묘사됐다.

책은 6.25의 포화에서는 빗겨났지만 피난민들을 통해 전쟁을 간접 경험한 제주도라는 독특한 지역 상황이 새롭고, 차분한 필체로 세철이의 시점을 따라가고 있어 훌륭한 성장 소설로 꼽을만 하다.

4.3이라는 격변을 겪고 6학년이 된 세철이. 그런데 세철이가 사는 제주도에 전쟁 고아들이 전학을 온다. 성산포에 미군 군함이 피난민 일단과 아이들을 내려 놓은 것. 그중에 키가 훌쩍 큰 성규, 다부진 영탁이, 하얀 얼굴의 유원이가 세철이 반으로 전학 온다.

미군의 오인 폭격으로 부모를 잃은 유원이 등 가슴 아픈 사연을 가진 아이들이지만 이들은 말쑥한 차림새에 자존심이 여간 센 게 아니다. 세철.석호.명환이 같은 제주도 아이들은 좀처럼 기죽지 않는 피난민 아이들이 얄밉기만 하다.

특히 경쟁심이 발동한 세철이는 공부를 더 잘 해보려고 담임선생님 집에서 시험문제를 훔쳐보고, 어머니 돈을 슬쩍 훔치기도 한다. 이 사실을 안 형은 잘못을 저지를 때마다 헛간 기둥에 쇠못을 박으라고 벌을 준다.

갈수록 늘어나는 못들. 형은 착한 일을 하면 하나씩 못을 뽑아라고 했지만, 성질 급한 세철이는 어느날 못을 모두 뽑아 버린다. 그러나 못을 뽑아 버려도 못자국은 남았다. 급기야 세철이는 연장통에서 자귀를 꺼내 못자국을 파내기 시작한다.

물론 자국은 더 커져 버린다. 이 못자국을 가슴에 안고 세철이는 읍내 중학교로 진학한다. 전쟁때문에 피폐해져버린 자신의 모습을 부끄러워하는 아이의 마음이 그대로 전해져 아릿하게 남는 소설이다.

홍수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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