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명함 돌리니 “어디 출마하세요” “저도 몰라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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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욱
정치국제부문 기자

조광한 전 청와대(노무현 정부) 홍보기획비서관은 내년 총선 예비후보 등록 첫날이었던 15일 새정치민주연합 소속으로 남양주갑에 등록을 마쳤다. 예비후보로 등록하면 선거사무소를 열 수 있고, 그 외벽에 대형 현수막을 걸 수 있다. 얼굴 알리기가 지상과제인 정치신인들에겐 가뭄에 단비가 오는 날이다. 하지만 조 후보는 기다렸던 등록을 하고도 어디에 사무소를 내야 할지 정하지 못했다. 선거구 획정이 안 돼서였다. 결국 그는 ‘집 사무소’를 선택했다. 남양주시 금곡동 아파트에 있는 자신의 집을 선거관리위원회에 사무소로 등록한 것이다. 선거전략 회의도 집에서 했다. 하지만 아파트다 보니 현수막을 내거는 일은 생각조차 못했다. 여야가 내년 총선용 선거구 획정을 못해 벌어진 기이한 풍경이다.

정치 신인들 울화통
선거구 미정, 지역구 표시 못 해
총선 예비후보 등록 시작됐지만
집에 사무소 열고 현수막도 포기
“현역 의원은 의정보고서로 홍보
우린 수갑 채운 채 권투하는 격”

  선거구가 어떻게 쪼개질지 모르는 캄캄한 상황이다. 조 후보는 “이사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조차 정하지 못한 상태”라며 “내가 어느 동네를 대표해야 할지 알 수 없으니 선거구 맞춤형 공약은 전혀 내놓지 못하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요즘 여의도 국회 주변엔 이런 정치신인들의 하소연이 끝도 없이 들려온다.

 분구(分區)가 예상되는 김포에서 출마를 선언한 새누리당 이윤생 예비후보는 명함에 담당할 동네들을 명시하지 못했더니 15일 명함을 받은 시민 중 대다수가 “도대체 김포 어느 동네에서 출마하겠다는 것이냐”고 물어왔다고 한다. 그때마다 그는 분명하게 답하려 애썼지만 결정적으로 분구 경계선으로 거론되는 동네 주민이 “그럼 우리 동네에 나오는 거냐”고 물으면 “그건 저도 잘 모르겠다”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예비후보가 되면 지역구 세대수의 10%에 한해 홍보물 우편 발송을 할 수 있다. 명함 돌리기가 ‘지상전’이라면, 우편물 발송은 ‘공중전’이다. 선거전 초반 현역 의원보다 불리한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선 꼭 필요한 작업이다. 하지만 부산 서구에 새누리당 예비후보로 등록한 곽규택 변호사는 15일까지 홍보물 발송은커녕 제작도 못한 상태였다. 서구가 인근 중구·동구와 어떻게 붙고 찢어질지 예상이 불가능한 상태라서다.

 곽 후보는 “현역 의원들이야 ‘의정보고서’라는 명목으로 홍보물을 매수나 횟수 제한 없이 뿌려대지만 정치신인들은 홍보물도 만들지 못하고 있다”면서 “경선이라는 게 한쪽에만 수갑 채워놓고 ‘공정하게 권투시합 하라’고 하는 격”이라고 했다.

 국회가 선거구 획정을 더 늦춰 연내에 하지 못하면, 새해엔 기존의 모든 선거구가 무효다. 이렇게 되면 예비후보들은 그나마 할 수 있었던 홍보활동도 중단해야 한다. 1분, 1초가 급한 정치신인들에겐 거의 만회가 불가능한 손해다. 한 정치신인은 “만약 공천에서 떨어진다면, 같은 처지의 신인들을 모아서 선거구 획정 지각으로 홍보시간을 빼앗은 19대 국회의원들을 상대로 소송을 걸 것”이라고 말했다. 사정이 이런데도 여야는 당초 선거구 획정 ‘데드라인’으로 설정했던 15일에도 결론을 내놓지 않았다. 신인들이야 울화통이 터지거나 말거나였다.

남궁욱 정치국제부문 기자 periodist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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