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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캐나다판 살인의 추억'…정부가 나서 진상 조사한다

중앙일보

입력

“희생자들은 정의를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유가족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위로해야 합니다. 우리는 함께 이 비극을 끝낼 것입니다.”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가 8일(현지시간) 퀘벡주 가티노에서 열린 캐나다 원주민 총회(AFN)에 참석해 지난 30년간 벌어진 원주민 여성들의 사망·실종 사건에 대한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위원회를 출범시킨다고 선언했다. 진상 조사를 위해 4000만 캐나다달러(약 348억원)의 예산이 책정될 것으로 보인다고 캐나다 언론은 전했다.

원주민 문화 말살 정책은 캐나다의 어두운 역사였다. 캐나다는 140년 전 인디언법을 만들어 원주민의 투표권을 빼앗고 이들의 종교와 문화 행사를 금지시켰다. 이런 정책은 20세기 중반까지 이어져 원주민 보호를 명목으로 원주민 문화 말살 정책을 폈다. 원주민 어린이들을 가정에서 빼앗아 강제로 기독교 기숙학교에 다니게 했다. 폭행과 성범죄도 벌어졌다. 2008년 스티븐 하퍼 당시 총리는 과거 정부의 ‘문화적 인종말살정책(Cultural Genocide)’에 대해 공식 사과했다.

강제 동화정책이 사라진 후에도 원주민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백인들의 원주민 박해와 인종 차별이 이어지며 1980년 이후 30여년간 살해된 원주민 여성은 백인 여성의 6배에 이르렀다. 캐나다 경찰 조사에 따르면 이 기간 1181명의 원주민 여성이 살해·실종됐고 상당수가 미제 사건으로 남았다.

인권단체들은 “캐나다 사회의 증오 범죄 증가와 원주민 사회의 빈곤·폭력 문제가 원주민 여성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며 정부 차원의 진상 조사를 요구해 왔다. 앰네스티인터내셔널(AI)·유엔여성차별철폐위원회 등도 진상 조사와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하지만 캐나다 정부는 “단순 범죄에 불과하다”며 거부해 왔다.

원주민들의 지지로 정권을 잡은 트뤼도 총리는 원주민 여성 살해·실종 사건 진상조사위원회 설치를 공약으로 내걸었다. 국가 차원의 사회 경제적 차별과 직결된 최우선 과제라는 게 트뤼도 총리의 시각이다. 캐나다 정부는 원주민과 피해자 가족의 입장을 최대한 반영해 진상조사위를 구성할 예정이다. 2개월 동안 사전조사작업을 진행하고 내년 봄 진상조사위를 본격 가동하기로 했다.

원주민 출신인 조디 윌슨 레이볼드 법무장관은 “어떤 조사도 지금까지의 비극과 희생자들을 되돌릴 순 없지만 앞으로 나아갈 길을 열어줄 것”이라고 말했다. 캐롤린 베넷 원주민장관은 “조사위 활동은 국가적 비극을 종식하고 모든 것이 바로잡힐 때까지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동현 기자 offram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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