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내 아버지의 6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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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칠순을 넘기신 나의 아버지는 확실한 친미.반공 쪽이다. "양놈" "양놈들"하다가도 종국에는 "미국은 고마운 나라"라고 편을 든다. '빨갱이'는 용납을 못한다.

그럴 이유가 있다.

6.25전쟁이 터지자 그는 육군소위(갑종 간부 3기)로 자원했다. 열아홉살 때다. 일찍 부모를 잃고 가난하게 단 둘이 살아온 어린 동생은 학도병으로 함께 전장에 나간다. 보병 소대장으로 아버지는 최일선에서 숱하게 죽을 고비를 넘겼다. 인민군에게 밀리고 밀려 "이제 모든 게 끝났다"고 절망했던 굴욕의 전황을 뒤집어 준 건 미국의 참전이었다. 미국엔 '한반도 교두보 구축'이라는 전략도 있었겠지만 우리에겐 뭐니뭐니 해도 생명의 은인이었다고 그는 말한다.

아버지는 전투 현장에서 목숨을 구해준 흑인 병사를 가끔 그리워했다. 총탄 소나기를 뚫고 다가와 지친 아버지를 참호까지 데려가 밀어넣어 주면서 알게 됐지만 이름도 생사도 모른다. 그 전쟁이 끝난 1953년에야 아버지는 동생이 2년 전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혼자가 된 것이다.

내 어린 시절 어느 저녁 전축을 틀어놓고 눈물 흘리는 아버지의 모습을 본 적이 있다. 현충일이었던 것 같다. 6월은 그에게 그렇게 아픈 달이다. 그가 받은 화랑무공훈장 속엔 50년 전 죽은 전우들과 동생의 목소리가 아직 들어 있다.

힘들었던 과거 때문이었을까. 그는 나만의 아버지는 아니었다. 어린 나에게는 자장면 한 그릇에 인색했지만 어려운 사람들에겐 다 털어주고 빈손이 되곤 했다.

잠시 공직에 있던 시절 그는 동네 소년소녀가장 20여명을 모아 야학을 꾸렸다. 쌀을 대주고 단체로 옷을 사입혀 창경원(그때는 동물원이 있었다) 구경도 시켜줬다. 태권도 고수(9단)인 그에게 약자를 못살게 구는 깡패들은 동네에서, 유원지에서, 열차 안에서 무자비하게 혼쭐이 났다.

일흔이 넘은 지금도 맨손으로 돌을 깨고, 아파트로 이사한 얼마 전까지 오전 5시면 일어나 온 동네를 빗자루질한 아버지다. 청년 시절 목숨을 내놓고 나라를 지켰고, 전쟁이 끝나고는 의를 지켜왔으니 그는 애국자다.

그런 그에게 요즘 6월은 심란하다.

젊은이들의 반미(反美)구호가 그 이유 중 하나다. 지난해 6월 미군 장갑차에 숨진 여중생 추모집회가 이런저런 과정을 거쳐 반미시위로 변하더니 유행처럼 돼 버렸다. 하필이면 6월에 그런 일이 벌어진다는 게 아버지에겐 아이러니다.

TV는 작년의 월드컵과 붉은 악마를 재방영하며 6월 한달 내내 요란했다. 아버지 역시 월드컵에 열광했던 한 사람이지만 '6월은 보훈의 달'이라는 생각이 사라져가는 것 같은 서운함이 그에게서 느껴지는 듯하다. 자신과 동생과 전우들이 이제 뒷전으로 밀리고 있다는 느낌 말이다.

그래선지 엊그제 있었던 작년 6월 서해교전 해군 전사자들의 전적비 제막식 장면을 그는 애틋한 표정으로 지켜봤다.

그 6월에 또 일이 생겼다. 3년 전 6월 남북 정상회담 대가로 북에 엄청난 돈을 줬다는 특별검사팀의 수사 결과 발표다. 발표일은 우연찮게도 '6.25'였다. 그는 또 무슨 생각을 했을까.

6월의 역사는 앞으로도 또 다른 일들로 더 복잡해질 거다. 하지만 내 아버지들의 아픈 6월은 잊혀지지 않아야겠다. 날카로운 일상과 세태 속에서 나 또한 잊고 있다가 아버지를 보면서 문득 떠오른 6월의 상념이다.

김석현 사회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