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강사 눈물 닦아주려다 일자리 빼앗게 생겼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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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학 박사과정을 수료한 뒤 학위논문을 준비 중인 시간강사 박모(35)씨는 최근 A대 학과장(교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다음 학기에도 강의할 생각이 있다면 미리 재직증명서나 사업자등록증을 구하라”는 조언이었다. A대는 내년 1월부터 시행되는 시간강사법에 대비해 박씨 같은 강사는 대폭 줄이고, 다른 직장에 근무하면서 강의를 맡는 겸임교수는 늘리려 한다. 강사 인건비 등을 줄이기 위해서다. 박씨는 “강의 빼곤 별다른 수입을 얻을 곳이 없어 친척들에게 딴 직장이 있는 것처럼 꾸밀 수 있는 방법을 묻고 있다. 강사를 돕자고 만든 법이라는데 왜 정작 난 ‘위장 취업’하는 상황이 됐는지 모르겠다”고 한숨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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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년 1월 시간강사법 시행을 앞두고 전국 대학과 시간강사들이 혼란에 빠졌다. 이 법은 2010년 조선대 시간강사의 자살 이후 대학 강사의 처우를 개선하자는 취지로 제정됐다. 하지만 시행 한 달여를 앞두고 대학은 물론 시간강사와 관련 단체 모두 법 시행을 반대하고 있다. 법에 따르면 내년부터 대학이 강사를 뽑으면 임용 기간을 1년 이상 보장해야 한다. 강사도 전임교원처럼 주당 9시간 강의를 원칙으로 하고, 변경하려면 별도 학칙을 만들어야 한다.

내년 1월 시행 예정 ‘시간강사법’
1년 임용에 주당 9시간 강의 보장

대학들 부담 늘어 강사 채용 줄여
겸임·초빙 교수로 대거 교체 우려
관련 단체 “법 폐지 뒤 재논의를”

 대학들은 “법이 시행되면 강사 수를 줄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2만여 명의 학생이 재학 중인 서울의 B대는 올 한 해 1800명의 시간강사에게 강의를 맡겼다. B대에 따르면 강사 규모를 올해처럼 유지하면 내년엔 30억원이 더 든다. 이 학교 교무처장은 “강사를 1년 이상 계약하면 방학에도 급여를 줘야 하고, 퇴직금 지급 의무도 생긴다. 게다가 강사 선발에 행정 비용도 든다”고 밝혔다.

 대학은 결국 강사는 줄이고 퇴직금·4대보험을 부담할 필요가 없는 겸임·초빙교수를 늘리는 대안을 선택하고 있다. 영남권의 C대는 현재 800여 명에 이르는 강사를 내년 200명 수준으로 줄일 계획이다. 강사 한 명에게 한 학기 1~2개 강의를 줬던 방식을 고쳐 한 명에게 3개(9학점) 이상을 맡긴다. 이렇게 되면 일부 강사는 1년 이상 신분을 보장받으나 다른 강사는 자리를 잃게 된다. C대 총장은 “법도 지키고 인건비, 행정 부담도 가능한 한 줄이려면 이 방법밖에 없다”고 털어놓았다.

 강의를 통폐합하는 대학도 생겼다. 강사를 1년 이상 보장한다는 조항 때문이다. D대 문화콘텐트학과 김모 교수는 “영화·드라마·게임으로 나눠 가르쳤던 창작 실습 수업을 강사 한 명에게 맡기려 하는데, 이럴 경우 강사로선 잘 모르는 분야도 가르쳐야 한다. 수업의 질이 떨어질 것”이라고 걱정했다. 강사법 폐지와 대체입법을 주장하는 비정규직교수노조의 임순광 위원장은 “강사 수를 줄이고 남은 강의는 몇몇 강사에게 몰아주는 ‘강의 쏠림’이 심해지면 대량 해직 사태가 올 수도 있다. 이 경우 석·박사과정 중인 젊은 연구자부터 강사 자리를 잃을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한국대학교육협의회도 국회·교육부에 법 시행을 늦추거나 아예 법을 폐지하라고 요구 중이다. 2011년 국회 통과 이후 강사법은 2012, 2013년 두 차례 시행이 유예된 적이 있다. 현재 국회에선 개정 논의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교육부는 최근 국회에 ‘강사 본인이 희망하는 경우 계약을 1년 내로 줄이자’는 의견을 냈다.

천인성 기자 guch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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