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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국 진입 가로막는 불신의 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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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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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훈
수출입은행장

대한민국 사회에 팽배한 불신의 늪이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다. 최근 한 온라인 리서치회사가 전국 만 19~59세 성인 남녀 2000명을 대상으로 사회적 신뢰에 대한 인식 조사를 한 결과, 응답자의 21%만이 다른 사람을 신뢰한다고 답했다. 특히 정부에 대한 신뢰도는 그보다 훨씬 낮은 8%에 그쳤다.

 이러한 불신의 확대는 공동체에 대한 연대의식 감소와 개인주의·경쟁의식 증대 등을 불러오고, 이는 결국 삶의 질 하락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현재 한국인의 삶 만족도는 34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27위로 하위권이다. 경제적 위상에 비해 만족도가 상대적으로 낮은 이유도 이런 신뢰 부족과 상관관계가 깊다.

 문제는 이러한 불신 풍조가 사회적 병리현상에 그치지 않고 궁극적으로 경제 성장에도 악영향을 미치게 돼 선진국 진입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는 점이다. 세계적 석학인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그의 저서 ‘트러스트’에서 한 국가의 경쟁력과 번영의 수준은 그 사회가 가지고 있는 신뢰의 수준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사회의 신뢰는 개인 사이의 협력을 촉진시키는 비공식적 규범의 집합으로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의 역할을 한다고 평가했다. 이러한 주장은 실제 실증적 연구로 이어져 한 사회의 신뢰수준이 10%포인트 증가하면 연평균 성장률이 0.8%포인트 상승한다는 결과가 도출되기도 했다.

 불신이 경제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은 거래비용을 증가시키기 때문이다. 사회에서 구성원간 의견 충돌로 갈등이 발생하는 건 일상적인 일이다.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시장자본주의 사회의 장점은 대화와 타협으로 갈등을 극복해 가며 사회를 더욱 성숙, 발전시켜 나간다는 점이다. 하지만 사회구성원간 불신이 널리 퍼지면 상호간 이견 조율에 상대적으로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들어갈 뿐만 아니라 신속한 의사결정도 이뤄지지 않아 경제 발전의 발목을 잡게 된다. 정부 입장에서도 신뢰 기반의 효율적인 시스템 작동이 느려지면서 막대한 관리 비용이 소요될 수밖에 없다.

 최근 ▶광우병 사태 ▶세월호 참사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 사태 등이 사회적 큰 이슈로 확대되고 엄청난 경제적 비용을 지불해야 했던 것도 지역과 계층의 감정에 따른 불신이 갈등을 증폭시켜 문제해결을 지연시켰기 때문이다. 불신은 시장의 불확실성을 확대시켜 경제성장을 가로막는다. 경제는 거래의 흐름이 원활하게 이루어져야 활성화된다. 그러나 타인에 대한 불신과 불확실성이 확대될 경우 경제거래가 위축되며 흐름이 정체되기 마련이다 사회가 불합리하고 불공정할 경우 개인은 사회의 규칙과 규범을 따르면 오히려 자신만이 불이익을 받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행동하게 된다. 결국 이러한 행위가 일상화되면서 사회적 불신이 확대·재생산되는 것이다.

 근세에 와서 영미권 국가들이 세계 최강국으로 도약할 수 있었던 것은 신뢰를 바탕으로 사회갈등을 발전적으로 극복하면서 경제제도를 효율적으로 운영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들 국가가 어떻게 사회적 신뢰를 확고하게 구축할 수 있었을까. 그 근저에는 바로 합리성·공정성·투명성이 있다. 이들 국가는 투명한 의사결정 과정에서 설정된 합리적 제도를 어떤 단기적 상황 변화에도 흔들리지 않고 실행하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자연스럽게 정치뿐만 아니라 사회에 대한 신뢰도가 높아지게 된 것이다.

 한국 사회는 선진국 진입을 목전에 두고 있다. 그러나 불신의 확대가 유래 없는 세계적 경기침체 속에 빠져 있는 한국경제의 회복과 발전을 지연시키고, 더 나아가 대한민국이 성숙한 사회로 나아가는 데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선진국으로의 도약을 위해 사회 각계각층이 합리성과 공정성 복원을 기초로 사회의 신뢰성 회복과 갈등 극복을 위한 협력에 나서야할 때다. “아무도 신뢰하지 않는 자는 누구의 신뢰도 받지 못한다”는 말이 유독 요즘 귓전을 맴돈다.

이덕훈 수출입은행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