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법 동맥경화 심각한 국회 … “여야 선진화법 악용 말아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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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 재신임’ 문제로 이견을 보였던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오른쪽)와 주승용 최고위원이 지난 9월 18일 최고위원회의에 참석해 있다. [조문규 기자]

19대 국회는 새로운 실험을 했다. ‘국회선진화법’이다. 국회의장의 직권상정과 다수당의 날치기 법안 처리를 원천 봉쇄하기 위해 2012년 5월 여야는 합의해 국회법을 고쳤다. 2010년 12월 ‘2011년 예산안’을 몸싸움과 날치기 속에 처리한 후 ‘몸싸움방지법안’의 필요성을 느꼈다.

양김 시대 그 후 <하>
선진화법 만든 주역들의 제안
1~2개 쟁점법안에 국회 중단 되자
합의 법안 먼저 통과시키자는 취지
서로 불리한 법안에 적용해 문제
5분의 3 의결 규정 범위 좁혀야

 그런 국회선진화법이 3년째 논란이 되고 있다. 정치 리더십과 팔로어십이 모두 위기인 상황에서 선진화법이 문제 해결을 가로막고 있다는 점에서다.

 과거엔 법안 등을 상임위 등에서 처리할 때 ‘재적 과반수 찬성’만 있으면 가능했다. 하지만 선진화법엔 ‘5분의 3 의결규정’이 있다. ‘재적 과반수 출석, 재적 과반수 찬성’이 일반적인 안건의 의결규정이지만 선진화법은 여야가 대립할 때 신속한 표결을 하려면 본회의에서 ‘재적 5분의 3의 찬성’이 있어야 한다. 상임위에서 여야가 합의하지 않는 경우엔 법안 통과가 거의 불가능하다. 리더십과 팔로어십이 모두 취약한 상황에서 여야 합의가 제대로 이뤄질 리 없다. 한쪽이 상정 자체를 반대하면 통과시킬 방법이 없다. 여야 합의가 안 된 법안을 본회의에 보내려면 상임위 단계에서도 5분의 3 의결규정이 적용된다. 5분의 3 의결규정을 피하기 위해 신속처리안건으로 적용하지 않으면 법안 처리는 더 어렵다.

 당초 선진화법을 주도해 통과시켰던 여야 인사들은 어떤 입장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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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진화법 공동발의자 중 한 명인 남경필 경기지사는 25일 “완벽한 법은 없으니 운영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한데 지금은 선진화법을 만들 당시의 취지를 살리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 어떤 점이 문제라는 건가.

 “처음 선진화법을 만들었을 때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처럼 어마어마한 이슈가 되는 법안이 1년에 1~2개뿐인데 이런 이해 충돌 사안 때문에 나머지 모든 법안까지 논의가 중단되는 것을 피하자는 생각이었다. 소수 법안에 대한 입장 차이로 국회가 통째로 막혀 식물국회가 되는 건 아니라고 봤다. 정말 심각하고 국가의 미래가 걸린 법안은 1년이고 2년이고 합의할 때까지 토론하고 나머지는 쭉쭉 통과시키자는 취지였다. 예산안도 정부가 멈추면 안 되니 통과 시점을 못 박기로 한 거다.”

 - 그런데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가.

 “신사협정을 먼저 위반한 것은 야당이다. 박근혜 정부 초반 정부조직법 개정안에 반대하면서 이 법안을 국회선진화법에 적용해 (5분의 3의 지지가 필요한) 신속처리 절차를 밟으라고 했다. 그 이후 여당도 불리한 법안을 선진화법 대상에 포함시켰다. 모든 법안을 선진화법에 적용하는 양태가 반복되면서 원래 정신은 사라져 버렸다.”

 - 어떻게 해야 하나.

 “여야의 협치가 활발해지고 그게 연정으로 이어져 선진화법이 필요 없는 게 가장 이상적이다. 하지만 당장은 안건조정위원회로 보내거나 5분의 3 규정을 따르는 법안의 범위를 좁힐 필요가 있다. 여야 합의로 ‘이런 법안만 선진화법 트랙에 올린다’고 정하면 협치를 통해 국회 마비를 막는 취지를 살릴 수 있을 것이다.”

 선진화법을 적극 추진했던 새누리당 김세연 의원도 “선진화법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구성원의 인식과 행동이 변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 안착을 못하고 있다”며 “국회에서의 폭력을 추방했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5분의 3 의결규정은) 국회에서 온건하고 합리적인 세력에게 ‘캐스팅 보트’를 주려던 취지였는데 당파성이 작용해 의원들의 행동을 제약하는 문화 때문에 문제가 생겼다”고 지적했다.

 야당의 법안 통과 주역들도 비슷한 목소리를 냈다. 새정치민주연합 원혜영 의원은 “국회 스스로 선진화법의 취지를 못 살린 채 상대방 발목을 붙잡으면서 법률의 문제점만 부각시킨 부끄러운 상황”이라며 “선진화법은 몸싸움으로 치달았던 국회의 문화를 바꾸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인 만큼 원래 취지를 살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새정치연합 김성곤 의원은 “국회의원은 개개인이 모두 헌법기관이니 여든 야든 상대 당에서 합리적인 주장이 있으면 팔로어십을 보여야 하는데 여야 모두 당론을 앞세우고 이를 통과시키려 하다 보니 선진화법 안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며 “국회가 동맥경화증에 걸린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

글=이지상·정종문 기자 ground@joongang.co.kr
사진=조문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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