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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팔’은 왜 실패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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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안혜리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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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혜리
중앙SUNDAY 기획에디터

‘응답하라 1988’(이하 ‘응팔’)은 왜 실패했을까.

 지상파도 아닌 케이블 드라마로는 이례적으로 방영 5회 만에 시청률 10%(닐슨코리아 기준)를 넘어설 정도로 이미 큰 성공을 거두고 있는 이 복고 드라마를 놓고 감히 ‘실패’라는 단어를 가져다 쓴 이유는 딱 한 가지, 바로 고증 때문이다. 시리즈의 두 전작인 ‘응칠’(응답하라 1997)과 ‘응사’(응답하라 1994)에서는 제작진이 집요하게 재생해낸 디테일한 고증 덕분에 시청자들이 자연스럽게 추억 속으로 빠져들 수 있었고, 이는 90년대 대중문화를 향한 열렬한 복고 열풍으로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웬일인지 똑같은 제작진이 만들었는데도 이번 세 번째 시리즈에선 바로 이 고증 때문에 몰입보다는 논쟁을 불러일으킨다. 드라마가 방영될 때마다 오류를 잡는 네티즌 지적이 쏟아질 정도다. ‘응사’에서 ‘응팔’까지는 불과 6년 더 거슬러 올라갔을 뿐인데 어디서 문제가 생긴 것일까.

 전국을 뒤져 어렵게 소품을 찾아내고 없으면 만드는 노력은 이번에도 계속됐다. 제작진이 고증에 소홀했던 건 결코 아니라는 얘기다. 아니, 오히려 그 시절 ‘기억의 재구성’을 위해 전작보다 더한 품을 들였다고 한다. 이 드라마의 신원호 PD는 “수백 명을 인터뷰했는데 사람마다 기억이 달라 상반되는 증언을 할 때가 많았다”고 했다.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그 시절 골목길과 사라진 물건을 찾는 것보다 엇갈리는 기억 속에서 딱 맞아떨어지는 접점을 찾기가 더 어려웠다는 설명이다.

 듣고 보니 바로 이게 문제였다. ‘응칠’과 ‘응사’는 드라마 주인공 또래인 제작진 스스로가 직접 경험하고 생생하게 기억하는 비교적 가까운 시절이라 완벽한 재생이 가능했지만 ‘응팔’은 앞선 세대의 기억에 주로 의존하다 보니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응팔’의 고증 실패가 무겁게 다가오는 이유도 바로 여기 있다. 불과 30년도 채 되지 않은 과거를 재생하는 데 있어 기록이 아닌 기억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안타깝다는 말이다. 만약 근현대 생활사 관련 유물 수집과 정리, 데이터베이스(DB) 구축 작업이 제대로 돼 있다면, 그리고 누구나 쉽게 여기에 접근할 수 있다면 아마 이런 오류는 빚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기억은 개인의 것이든 집단의 것이든 휘발성이 있다. 저마다 다르게 기억하는 것은 물론이요, 그냥 두면 조금씩 사라진다는 얘기다. 지금부터라도 제대로 기록하고 관리하는 습관이 절실한 이유다. 개인이든 국가든.

안혜리 중앙SUNDAY 기획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