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말을 전도시키는 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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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4호 34면

나는 매일 아침마다 커피 한 잔을 마신다. 언제부터 내게 그런 습관이 생긴 것일까. 습관은 김유신의 말이다. 주인의 의지와 달리 어느새 천관의 집으로 가버린다. 커피를 좀 줄여야지 생각하면서도 정신을 차려보면 커피 마지막 한 모금을 마시고 있다. 어쩌다 사정이 생겨 커피를 마시지 못한 날은 종일 안절부절 못한다. 일은 둘째 치고 아침마다 치르는 생리적 문제조차 해결하지 못한다. 그러니 아침이면 커피숍으로 출근하는 것이다.


날마다 커피를 마시려다 보니 커피값도 만만치 않다. 커피값이 밥값보다 비싼 곳도 많다. 식당에서 서로 밥값을 내겠다며 다투는 사람들은 나중에 더 비싼 커피값을 서로 안 내려고 실랑이를 벌이는 것이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내가 그런 사람이니까.


버스에서도 가끔 다투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그들이 밥값이나 커피값 때문에 다투는 것은 아니다. 아침 광역 버스는 항상 만원이라 빈자리가 드물다. 다행히 창가 쪽 빈자리가 하나 있어 반가운 마음으로 달려갔더니 옆 사람의 짐이 올려져 있었다. 그 아가씨는 짐이 많았다. 어디 여행이라도 가는 건지 크고 작은 가방이 세 개나 되었다. 하나는 안고 나머지 두 개를 옆자리에 올려놓고 그는 졸고 있었다.


나는 앉고 싶었다. 간절하게 앉고 싶었다. 내가 앉으려면 우선 꾸벅꾸벅 졸고 있는 고단한 그를 깨워야 한다. 그 다음 어떻게 해도 정리가 잘 되지 않을 것 같은 그의 짐들을 그가 수습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러고도 창가 쪽에 있는 빈자리로 가기 위해서는 통로 쪽에 앉은 그를, 세 개나 되는 가방을 안고 있어야 하는 그를 넘어가야 한다. 아쉽고 서운하지만 결국 나는 포기한다.


다음 정류소에서 탄 아저씨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이제 코까지 골며 곤하게 자는 아가씨를 흔들었다. 이봐요, 아가씨, 같이 좀 앉아 갑시다. 자다가 깬 아가씨는 가방을 들고 어쩔 줄 몰라 한다. 이 짐들을 어떻게 하라는 거냐는 듯 아가씨는 아저씨를 본다. 가방을 들고 앉아요. 아가씨는 결국 가방을 챙겨 창가 쪽으로 자리를 옮겨 앉는다. 무릎 위 세 개의 가방처럼 가득 쌓인 짜증이 아가씨 얼굴에서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다. 자리가 난 통로 쪽 의자에 앉으면서 아저씨는 혀를 찬다. 나 참, 자기 혼자 버스 전세 냈나?


아가씨가 고개를 돌려 아저씨를 본다. 아저씨도 아가씨를 본다. 뭘 봐? 자리 비켜드렸잖아요. 처음부터 자리를 비워놨어야지. 공중도덕이 없어. 왜 반말하세요? 왜? 반말하면 안 돼? 당연히 안 되죠. 내가 너 만한 딸이 있다. 나는 아저씨 딸 아니거든요. 자꾸 반말하지 마세요. 아저씨는 나를 본다. 내가 무슨 말이라도 해주길 바라는 것처럼. 나는 할 말이 없다. 나 참, 이거 봐라. 눈 똑바로 뜨고 어른한테 못되게 대드는 거. 아주 인간 말종이야, 말종. 아가씨도 나를 본다. 한마디 거들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듯. 나는 두 사람의 싸움에 말려들고 싶지 않다. 나는 고개를 돌린다. 아저씨가 뭔데 나한테 말종이라 그래요? 아 씨, 아침부터 재수가 없으려니까 정말. 아 씨? 야, 너 내려. 이게 어디서 죽으려고. 때려봐, 때려봐. 미친 놈.


애초에 두 사람은 무엇 때문에 다툰 것일까? 처음에는 자리 때문이었는데 말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본래의 이슈는 사라지고 지금은 표정과 말투 때문에 싸우고 있다. 애초에 무엇 때문에 다툰 것인지는 이제 중요하지 않다. 아저씨의 고압적인 말투와 아가씨의 짜증스러운 표정이 서로에겐 더 중요하다. 관습적인 싸움의 양상은 이런 식이다. 개인적이든 사회적이든. 폭력성과 불법성만 남고 본래의 이슈는 사라진다. 조금만 방심하면 본말이 전도되고 무엇 때문에 싸움을 시작한 것인지 다 잊어버리는 것이다.


아침에 자주 가는 커피숍에 들렀다 나오는데 거기서 일하는 아가씨가 쫓아 나오며 나를 부른다. 무슨 일이지? 계산은 한 것 같은데. “커피 가져 가셔야죠.” 커피가 담긴 내 텀블러를 건네며 아르바이트 아가씨가 웃는다. 그러니까 나는 개인 텀블러를 내밀며 커피를 주문하고 커피 값을 지불하고 포인트도 적립하고 영수증도 챙겼지만 정작 커피는 받지 않고 커피숍을 나온 것이다. 그럴 거면 나는 애당초 커피숍에는 왜 간 것일까? ●


김상득 ?결혼정보회사 듀오의 기획부에 근무하며, 일상의 소소한 웃음과 느낌이 있는 글을 쓰고 싶어한다.『아내를 탐하다』『슈슈』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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