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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는 술을 권한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452호 22면

“연말 지나고 다음 번 검사 결과는 장담 못하겠네요.”


최근 외래 환자들 중 상당수는 생활 습관 잘 유지하고 다음에 오시라는 인사에 이런 대답을 한다. 다가올 송년회에서 과음할 것이 뻔 하니, 그 직후에 올 때 검사 결과가 나빠지더라도 뭐라 하지 말라는 의미다. 요즘은 바쁜 12월을 피해 11월부터 송년회를 시작하니 조금 있으면 그들의 일정표는 빽빽하게 채워질 것이다. 한 해를 보내며 좋은 사람들과 즐거운 자리를 함께 하는 것은 참 좋은 일이다. 하지만 건강에 치명적인 술이 모임에서 빠질 수 없다는 것이 벌써부터 나를 걱정하게 만든다.

일러스트 강일구

한국인의 술사랑은 정말 남다르다. 진료실에서 음주량을 물으면 “얼마 안 마셔요. 1주일에 3~4일, 한 번에 소주 1~2병”이란 대답이 일반적이다. 좀 줄이라고 하면 “그 정도 마실 거면 뭐 하러 마셔요”라고 말한다. 국민건강영양조사에서도 1회 평균 음주량이 7잔(여성 5잔) 이상으로 나타났다. 주 2회 이상 음주하는 고위험 음주율이 만 19세 이상 성인남성은 20% 안팎, 여성은 5-6% 정도였다. 그 중에도 사회생활이 활발한 30~40대 남성 4명 중 1명은 고위험 음주자이고, 남성 운전자 6명 중 1명은 최근 1년 이내 음주운전을 했다고 한다. 음주운전은 말할 것도 없고, 자정이 넘어서도 귀가하지 않고 술을 마시는 것이나, 늦은 시간 학원가에서 쏟아져 나오는 어린 학생과 인근 유흥업소에서 쏟아져 나오는 술 취한 사람들이 섞여서 길을 걸어가는 것이 별로 이상하지 않게 받아들여지는 사회 분위기는 바람직하지 않다. 아이들이 음주를 그리 문제되지 않는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만들기 쉽다.


한국사회에서 아버지는 업무 후에 술 마시고 늦게 들어오는 사람이고, 술을 많이 마신 날에는 주정도 좀 하는 것이 당연하게 인식돼 왔다. 드라마나 영화 주인공도 속상한 일이 생기면 어김없이 혼자 술집에 앉아 인사불성이 될 때까지 마신다. 이런 것이 일반적인 어른들의 모습으로 비춰지고 있다. 이런 사회이다 보니, 남고생 7명 중 1명이 최근 1개월 간 소주 5잔 이상을 1회 평균 음주량이라 꼽고, 여고생 10명 중 1명이 소주 3잔을 1회 평균 음주량이라 꼽은 통계는 놀랍지 않다.


대학 입시의 관문을 통과하자마자 모임을 다니며 술 마시는 것이 마치 어른으로의 입문과정이라 인식되고, 직장 생활을 하면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술을 거절하지 않아야 도리라고 여기는 분위기 역시 한국인의 음주 통계에 일조를 한다.


“딱히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직장에서 저의 존재 이유가 술로 다른 사람들 만나는 것이다 보니 술은 제 가족의 생계와 직결된 문제예요.”


잦은 음주로 건강이 나빠져 병가를 냈던 환자가 복직을 앞두고 불안해하며 했던 얘기다. 당시 그가 느낀 불안이 내게도 고스란히 전달되었던 것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얼마 전 1급 발암 물질 명단에 햄·소시지가 추가되며 해당 음식을 기피하는 등 논란이 많았다. 담배와 술은 이미 그 명단에 포함돼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 내가 무심코 건네는 한 잔의 술이 상대에게 치명적인 건강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다는 것을 한 번 더 생각해 볼 일이다.


박경희한림대 성심병원 가정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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