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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view &] 임직원 사지로 내모는 롯데가 분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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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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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재용
산업부장

롯데그룹 신동주·동빈 형제간 전쟁이 본격화하기 직전인 7월 초의 일이다. 롯데의 한 계열사 사장은 속된 말로 ‘잠수’를 타야만 했다. 그가 휴대폰 전원까지 끈 채 황급히 종적을 감춘 것은 말 그대로 고육지책이었다. 사정은 이렇다. 형 신동주 부회장의 측근이 몇몇 계열사 사장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는 물었다. “(형과 동생 중) 누구 편에 설 것인지 밝혀라.” 줄세우기를 강요당한 직후 그는 몸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 최근 사석에서 만난 그는 “의지와 상관없이 분쟁에 내몰릴까봐 아예 지방으로 피신했다”고 털어놨다. 술이 좀 돌자 그는 “‘줄 서’라는 말을 듣는 순간 30여 년간 열심히 살아온 샐러리맨으로서 자부심이 일순간에 무너졌다”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롯데의 경영권 분쟁은 막장 드라마보다 더 막장 같은 싸움으로 그 어느 여름보다 국민의 불쾌지수를 높였다. 계절이 바뀌었지만 스토리는 별반 달라질 기미가 없다. 동생인 신동빈 회장 체제로 귀결되는가 싶더니 형인 신동주 부회장이 다시 반격에 나서는 형국이다. 일본에 거주해 온 신동주 부회장은 아예 한국에 상주하다시피 하고 있다. 한국어를 전혀 못한다는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전직 국책은행장 출신 인사를 내세워 언론 대응 전담팀도 꾸렸다.

 특히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34층은 막장 드라마의 메인 무대다. 이 곳은 롯데 창업자이자 형제의 부친인 신격호 총괄회장의 집무실 겸 숙소가 있는 곳이다. 양측은 자신들이 신 총괄회장을 보좌하겠다며, 각각 임명한 의전·비서팀을 롯데호텔에 배속시켜놨다. 그 결과 초유의 ‘한 집무실, 두 비서팀’이 대치하고 있다. 얼마 전엔 부친의 심신 상태가 문제없다는 것을 증명하겠다며 장남과 측근들이 신 총괄회장을 대학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하지만 신 총괄회장이 “주삿바늘이 무섭다”며 진료를 거부해 병원 투어만 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진흙탕 싸움의 파편은 여기저기로 튀고 있다. 계열사 사장의 30년 자부심에 상처를 내는 건 약과다. 열심히 일해 온 애꿎은 롯데 임직원의 삶까지 위협하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특히 면세점에 종사하는 롯데 임직원들은 요즘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다시피 하고 있다. 경영권 분쟁으로 여론이 악화하면서 자칫 면세점 사업권을 반납해야하는 상황이 생길지 몰라서다. 롯데는 롯데백화점 서울 소공점과 월드타워점에 면세점을 하고 있고, 면세점 사업권은 5년마다 정부의 심사를 받게 되는 허가 사업이다. 그러나 롯데의 이미지가 나락에 떨어지면서 정부와 정치권에선 롯데의 면세 사업권을 지속시킬지 여부에 대한 고민이 커지고 있다. 롯데 면세점에서 묵묵히 일해 온 임직원들로선 생사가 걸린 직장을 일순간에 잃어버리는, 그야말로 청천벽력 같은 현실에 내몰릴 수도 있다.

 이런 불안에 떠는 롯데면세점 종사자는 롯데 직접 고용 인력만 273명이고, 용역과 판촉 직원 등 간접 고용인력까지 따지면 3400여 명에 달한다. 이들의 실업 공포는 결코 기우가 아니다. 롯데가 김해공항 면세점 사업권을 잃은 후 실직한 390여 명의 정규직중 250여 명은 여전히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신규 면세점 사업자가 기존 사업장과 인력을 인수하는 방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부를 제외하면 대다수 인력이 보따리를 싸야만 한다.

 이쯤 되면 밝혀야 한다. 평생을 회사에 바쳐 온 임직원과 그 가족의 삶까지 나 몰라라 하면서 경영권 싸움에 매달리는 목적을 말이다. 누가 승자가 되건 싸움이 이런 식으로 흘러가면 한국에서 기업인으로서 리더십은 사실상 끝난다. 참담한 심정으로 오너 형제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는 수십여만 명의 롯데 임직원들을 다시 한번 되돌아보길 간곡히 바란다.

 일본 사정에 누구보다 밝은 기업인들인 만큼 도요타 이야기로 글을 맺을까 한다. 본지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이 전한 2010년 대규모 리콜 사태 때의 뒷얘기다. 미 하원 청문회에 소환당하는 수모를 겪은 도요타 아키오 사장은 청문회가 끝난 후 미주 지역 도요타 임직원들과 함께 한 자리에서 눈물을 쏟았다. 그는 도요타 창업가의 4대 경영인이다. 그가 밝힌 눈물의 의미는 이렇다. “내가 그들(미국 내 고객과 딜러·판매점)을 지켜줘야지 생각했는데, 실은 그들이 나를 지켜주고 있었다는 걸 깨닫자 눈물이 쏟아졌다….”

표재용 산업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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