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에 살다] (6) 토왕폭과 송준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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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송준호의 1주기인 1974년 1월 2일. 송준호의 연인이었던 '까만 돌'은 한 남자와 노루목의 '석주 무덤' 곁에 누워 있는 송준호를 찾았다. 송준호의 묘에 두 번 절한 그 남자는 노루목을 굽어보고 있는 하얀 토왕폭을 바라보며 송준호에게 산친구로서 약속을 했다.

'그대 뜻대로 까만 돌이 살아가도록 평생을 보살피겠소.'

그는 송준호와 절친한 동양산악회 소속 산꾼이었고, 농대 출신의 젊은 '상록수'였다. 까만 돌과 상록수는 결혼했다. 상록수는 결혼 후 고향인 전북 장수로 내려가 어릴 적 꿈인 목장을 만들었다.

스칼렛 오하라를 닮은 까만 돌과 상록수의 집념으로 자그마하던 목장이 5만여평으로 커지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토왕폭과 까만 돌과 젊은 상록수, 그리고 송준호의 그 절절한 설악산 사랑은 내 가슴까지 뜨겁게 달궈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얘기 하나 하지.

"옛날 어느 산에 폭포가 하나 있었어. 그 폭포는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지는 높고 곧은 폭포였지. 그 폭포가 얼마나 높은지, 또 언제부터 언제까지 떨어지는지 아무도 몰랐어. 그런데 그것을 아는 이가 한 사람 있었어. 그는 노래꾼이었는데 성은 김이었고, 이름은 수영이라 했지. 그의 노래 한번 들어봐.

'폭포는 곧은 절벽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진다. 규정할 수 없는 물결이 계절과 주야를 가리지 않고 고매한 정신처럼 쉴 새 없이 떨어진다. 금잔화도 인가도 보이지 않는 밤이 되면 폭포는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곧은 소리는 소리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

그런데 말이야, 곧은 소리를 내며 곧게 떨어지던 그 폭포가 어느 겨울날 얼어붙은 후 풀리지 않았어. 계절을 잃은 그 폭포는 더 이상 노래하지 않았던 게야. 얼마나 답답했겠어. 폭포나 보는 사람이나 말이야. 그래도 다들 편히 잠자고 있을 때 곧은 폭포소리를 못내 그리워하던 한 소년이 폭포를 풀려고 하얗게 얼어 붙은 폭포에 올라간 게야. 미끄러져도 오르고 떨어져도 오르고 올라 소년은 폭포의 언 얼굴에 매달렸어. 그는 맨주먹으로 차가운 얼음덩어리를 두들겼어. '폭포야 풀려라. 한을 풀어라'하고 마구 두드린거야. 두드리다 두드리다 두 주먹이 핏빛으로 멍들었어. 이제는 풀릴 만도 하겠건만 폭포는 그래도 움직이지 않았어. 폭포는 가슴마저 얼어붙은 거야.

그러다, 그러다가 말이야. 폭포는 문득 이렇게 웅얼거리기 시작했어.

'네 머리로 여기를…'.

소년은 결국 폭포를 푸는 열쇠 구멍에 제 머리와 몸을 던져버린 거야. 그래서 폭포는 계절과 밤낮을 되찾고 다시 곧은 소리를 내며 소리치기 시작했어. 동해에서 치솟은 맑은 햇살이 폭포를 비출 때면, 지금도 그 소년의 붉은 피가 폭포수로 변해 절벽의 폭포를 곧게 곧게 떨어뜨리고 있지. 그러다 겨울이 오면 폭포는 하얀 얼음으로 소년의 넋을 설악의 하얀 신화로 다시 결정시키곤 하는 게야."

박인식 <소설가.前 사람과 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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