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람] 이준구 美 태권도계 대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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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누군가 헬렌 켈러 여사에게 물었다. "장님으로 태어난 이보다 더 불행한 사람이 누구냐"고. 켈러 여사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시력은 있지만 비전이 없는 사람"이라고.

위대한 꿈을 지닐 때 인간은 비로소 위대해진다. '미국 태권도의 아버지', 미국 이민자 가운데 가장 성공한 2백명 중 한명으로 뽑힌 이준구 사범은 평생 꿈을 버린 일이 없는 '작은 거인'이다.

李사범이 지난 19일 코엑스에서 개막한 세계문화오픈(WCO)에 참가하기 위해 내한했다. 거의 매년 고국을 찾아 진실과 아름다움, 사랑의 철학을 설파해온 李사범이 WCO에 참가하는 감회는 각별했다.

"문화.정신운동인 WCO가 내 조국 대한민국에서 열리는 것은 필연입니다. 인도의 위대한 시인 타고르가 노래로 예언했던 '동방의 등불'이 마침내 세계를 향하여 찬란한 빛을 내뿜기 시작한 겁니다."

李사범은 미국 이민사에서 전례를 찾기 어려운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1956년 미국으로 건너간 李사범은 단순히 '싸움의 기술'을 가르치는 무술인이 아니라 '인간을 가르치는 무도인'으로서 진가를 발휘했다. 전.현직 미 연방 하원의장을 포함, 2백70여명의 미국 상.하원 의원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쳤고, 레이건 전 대통령에 이어 현재는 부시 대통령의 체육.교육 특별고문직을 맡고 있다.

86년 10월 미국에서 '스승의 날'이 李사범의 제창으로 제정됐을 만큼 그의 영향력은 크다. 워싱턴의 컬럼비아 지역의회는 李사범의 태권도 학교 설립 40주년을 기념해 오는 28일을 '준 리(李 사범의 미국 이름)의 날'로 선포하기로 했다.

요즘 李사범은 자신의 구상으로 시작된 '진.미.애 운동'에 진력하고 있다. 자신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 마다 않고 달려간다. '내가 진심(眞心)으로 살아가면 내 마음은 아름답고(美心), 그러면 모든 사람이 나를 사랑하는 마음(愛心)으로 대할 것이다. 그때 나는 행복하며 행복을 느끼는 그곳이 바로 천국이 된다'는 운동의 주된 내용이다.

그러면 마음이 모든 걸 결정한다는 뜻일까. 李사범의 설명은 명쾌하다. "지식은 실천으로 완성됩니다. 제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성공한 이민자로 선정됐다든지 정계와 문화계 곳곳의 인사들과 폭넓게 교류하게 된 것은 제가 그러한 성공과 교류를 원해서가 아니라 제가 믿고 알고 있는 사실을 실천을 통해 증명하고 거기에 미국인들이 동의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李사범이 보는 세계는 단순하다.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이 살지만 결국은 '물만 마시고 숨만 쉬어도 기쁜 사람'과 '2백만달러를 손에 쥐고도 만족할 줄 모르는 사람'으로 나눌 수 있다고 그는 말했다.

"지구가 생긴 이유가 뭔지 아세요? 뭇 생명에게 하느님이 선물한 행복한 보금자리가 바로 지구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보금자리를 불신의 세계로 만들었습니다. 전쟁은 가장 대표적인 파괴행위지요. 전쟁으로 전쟁을 없앨 수는 없습니다. 전쟁을 없앨 수 있는 것은 인간을 인간으로서 완성할 때뿐입니다."

그러면 인간의 완성은 무엇으로 이룩할 수 있다는 걸까. 李사범은 양심과 박애가 답이라고 했다.

"궁극적인 세상의 모습은 어떻게 변해 있을까요. 아마도 속박 없는 세상, 감시가 사라진 세상이 될 것입니다. 그런 세상은 아마도 예술이 지배하는 세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유일한 경쟁이 있다면 누가 더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고 더 많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느냐 하는 경쟁일 테지요."

李사범이 꿈꾸는 세상에서 요리사는 음식으로, 음악가는 아름다운 멜로디로 이타(利他)의 경쟁을 벌이게 된다. 이 소박하면서도 간절한 꿈은 불가능에 가까워 보인다. 그러나 꿈을 지닌 사나이에게는 꿈도 더 이상 꿈이 아니다.

"1백년 전에도 인간이 하늘을 날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요. 라이트 형제도 서로를 의심했을지 모르죠. 그러나 지금은 인간이 우주를 드나듭니다."

李사범은 올해 73세의 '노인'이다. 그러나 탄탄한 몸매와 힘찬 목소리는 나이를 알 수 없게 한다. 채식과 긍정적인 사고를 젊음의 묘약으로 소개한 李사범은 요즘도 하루 1천번의 팔굽혀펴기로 몸을 다진다. '진.미.애'의 세계를 맞이하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이 늘 자랑하고픈 하모니카 솜씨로 좀더 많은 이웃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서.

허진석 기자 <huhball@joongang.co.kr>
사진=김상선 기자 <ss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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