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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집 없는 억만장자 “행복해지려면 스님이 돼야 하나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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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진관사 함월당에서 선우스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니콜라스 베르그루엔(왼쪽 두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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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 템플스테이 동행 취재

“스님뿐 아니라 이곳에 있는 사람들 얼굴엔 행복이 가득합니다. 행복해지기 위해선 저도 승려가 돼야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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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1일 서울 진관사에서 산책을 하고 있는 베르그루엔. 그가 입은 옷은 주지인 계호 스님이 입던 누비로 된 승복이다. 베르그루엔이 “정말 편하다”고 감탄하자 계호 스님은 그에게 옷을 선물했다. [신인섭 기자]

 지난달 31일 서울 은평구 진관사 함월당. 토요일 아침, 고요함 속에서 차를 마시던 승복 차림의 외국인이 비구니 선우 스님에게 물었다. “수도자의 얼굴이 평화로운 것은 매 순간 금전욕·식욕·애욕·수면욕·인정욕, 다섯 가지 욕구에서 자유로워지려고 끊임없이 노력하기 때문이지요. 수도자가 되지 않아도 수행을 하면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대답을 듣는 외국인의 표정에선 작은 미소가 스치고 지나갔다.

 글로벌 기업들에 투자하고 있는 억만장자에게도 행복은 보장되지 않는 것일까. 물음을 던진 이는 ‘집 없는 억만장자’로 알려진 니콜라스 베르그루엔(Nicolas Berggruen·54)이었다. 1~4일 중국에서 열리는 ‘21세기위원회’ 참석을 앞두고 서울시 초청으로 방한한 그는 중국으로 떠나기 전 마지막 밤을 진관사에서 보냈다.

 서울시 측이 동양사상에 관심이 많은 베르그루엔에게 한두 시간의 사찰 방문을 제안하자 그가 하룻밤 ‘템플스테이’를 하고 싶다고 답했다. 지난달 27일 방한한 그는 3일간 머무르던 신라호텔에서 짐을 싸 30일 오후 6시쯤 진관사에 도착했다. 본지는 31일 새벽 3시부터 체험이 끝난 오전 11시까지 베르그루엔과 동행하며 취재한 뒤 그를 인터뷰했다.

 ◆“108배는 나 스스로에게 묻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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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그루엔이 진관사 경내에서 선우 스님과 산책하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속세에서 유전공학 연구원이었던 선우 스님은 유창한 영어로 외국인 템플스테이를 맡고 있다. [신인섭 기자]

 새벽 3시30분. 전날 밤 9시쯤 적묵당에서 잠자리에 들었던 베르그루엔은 승복을 차려입고 동정각으로 향했다. 베르그루엔 연구소의 던 나카가와 부소장 등 일행 3명과 함께 종 앞에선 그는 선우 스님을 따라 종을 쳤다. ‘뎅~뎅~뎅~’ 돌아가며 서른세 차례의 타종을 끝낸 일행은 “매일 33번씩 종을 치는 건 중생들을 계도하는 의미”라는 설명에 고개를 끄덕였다. 타종 후에는 스마트폰 카메라로 자신들의 모습을 담기도 했다.

 대웅전으로 자리를 옮겨 예불을 마치고 함월당에 4시쯤 모인 이들은 선우 스님으로부터 108배의 의미를 들었다. 편히 앉아서 들어도 된다고 했지만 베르그루엔은 한사코 무릎 꿇고 앉은 채 진지하게 설명을 경청했다. 이어 영어로 제작된 ‘나를 찾는 108배’ CD에서 나오는 소리에 맞춰 절을 시작했다. 30여 분간 108배를 올리는 내내 그는 한순간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절반을 넘어갈 때쯤 일행이 그만해도 된다고 만류했지만 108번의 절을 모두 마쳤다.

 -108배를 끝까지 했다. 무엇을 기원했나.

 “기도하고 절하는 의식은 무언가를 기원한다기보다는 나 스스로에게 묻는 시간이었다. 어떻게 하면 내가 더 나아지고 행복해질 수 있는지 끊임없이 생각했다.”

 - 답을 얻었나.

 “108배뿐만 아니라 이곳에서 하루를 머물며 느낀 게 많다. 아름다운 사찰에서 놀라운 경치를 보며 스님들과 시간을 보내서 좋았다. 정신적으로는 나 자신의 삶과 행동을 지금까지와는 다른 관점에서 보게 되었다. 스님들이 수행을 통해 자아를 향상시키는 방법에 대해 얘기해줬다. 타인을 이해하고 관대하게 바라보며 공유하는 방식이다. 더 나은 삶을 살고 행복해지기 위해선 나와 내 주변 상황을 보다 객관적으로, 이타적으로 바라보면 되지 않을까. 내 재산과 재능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고 싶다.”

 - 원래 불교신자인가.

 “아니다. 나는 불교뿐 아니라 모든 사상과 철학, 종교에 관심이 많다. 불교는 종교를 넘어 수양과 삶의 방식에 관한 것이다. 그래서 특별히 더 관심이 간다.”

 ◆"자유민주주의에 동양적 요소 도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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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그루엔이 직접 우려낸 차를 따르고 있는 모습. [신인섭 기자]

 유명 미술거래상이었던 아버지 밑에서 자란 베르그루엔은 베르그루엔 홀딩스를 세워 햄버거 체인인 버거킹, 프랑스의 유력 신문인 르몽드 등 50여 곳에 투자해 큰 성공을 거뒀다. 파이낸셜타임스가 선정한 세계 최고 부자 중 한 명이다. 언론을 통해 알려진 보유자산만 15억6000만 달러(약 1조8000억원)에 달한다. 한때는 할리우드 스타들과 어울리며 ‘셀럽(유명인)’의 삶을 살기도 했다. 하지만 2010년 “시간과 에너지는 제한된 자산이다. 이왕이면 효율적으로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쓰고 싶다”며 자신의 재산 1억 달러를 투자해 베르그루엔연구소를 설립한 이후 사회변혁가이자 활동가로 명성을 얻었다. 연구소는 국제 싱크탱크인 21세기위원회 등을 운영하고 있다.

 - 거버넌스 개선에 큰 관심을 보여왔는데.

 “동서양 체제를 융합하는 게 아니라 서로의 장점을 배워 상호 발전하는 체제를 도출하고 싶다. 동서양은 각각 장단점이 있다.”

 - 동양과 서양에 어떤 차이가 있나.

 “서양의 민주주의는 개인에게 힘과 자유, 보호를 제공한다. 또 시민들에게 정부를 교체할 힘을 준다. 다만 정치인 선출 시스템이 인기투표처럼 되고 있다. 그들이 공공의 이익을 대변하는 대신 소속 정당의 이익을 대변하는 일이 많아지고 있다. 반면 싱가포르나 중국의 정치시스템은 정부가 국민에게 봉사하고 국민을 만족시켜야 살아남을 수 있다. 이런 서비스를 강력하게 추진할 힘도 있다. 하지만 시민들의 자유가 제한된다는 한계가 있다. 근본적으로 자유민주주의가 더 역동적이고 인간적인 시스템이지만 여기에 동양적 요소를 어떻게 도입해 균형을 맞출 것인가가 문제다.”

 - 21세기위원회에서는 어떤 것을 다루나.

 “21세기가 평화롭고 생산적이기 위해선 중국이 매우 중요하다. 중국은 경제적으로 엄청나게 변하고 있지만 정치적 안정을 유지해야 하는, 어려운 목표도 가지고 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등과 함께 이에 대한 해법을 찾고 싶다. 한국에선 홍석현 중앙일보·JTBC 회장과 박원순 서울시장이 위원으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중국의 이웃 나라인 한국을 대표해 의견을 제시해줄 것으로 기대한다.”

 ◆"조만간 미국에 정착할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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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정한 주거지 없이 세계 곳곳의 호텔에 머물고 있는 베르그루엔은 언제쯤 정착할까. 그는 “나는 세계시민이고 내가 가는 곳이 나의 집”이라며 “서울의 명예시민이 된 터라 지금은 서울이 집”이라고 말했다. 이어 “다만 연구소가 있는 미국에 보다 많이 머물고 가깝기 때문에 조만간 정착할 생각”이라고 덧붙였다.

 베르그루엔은 템플스테이를 하는 동안 배려가 담긴 행동으로 진관사와 방한 일정을 주관한 서울시 관계자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는 고무신을 벗고 방에 들어갈 때마다 신을 바깥쪽으로 가지런히 정리한 뒤 들어갔다. 그는 “내가 신발을 벗고 들어가면 누군가 바깥을 향하게 방향을 바꿔놓았다. 나 때문에 괜히 수고하실까 봐 그렇게 했다”고 말했다.

글=박민제 기자 letmein@joongang.co.kr
사진=신인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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